어스레기의 행복지수

돈, 그리고 돈.

바라쿠다 2014. 9. 15. 15:43

성장기를 지나는 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움 따위는 없었고, 나름 풍요롭게 살았지 싶다.

70년대 중반부터인지 기억은 확실치 않지만, 한 집안의 가계 살림이란 것이 끼니를 거르는 어려움이란 것은 차츰 사라져

갔던 시절이고..

그 당시 한국 경제를 이끌던 재벌 총수의 재산이란 것도 수십억을 넘지 못했지 싶다.

불과 몇십년만에 그들의 재산이 수조원까지 넘어섰고, 우리네 서민들로서는 어림짐작조차 불가능한 수치로 변했지만..

태생이 책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놈인지라 고등학교 시절부터 놀새로 이름을 날렸고, 어줍잖은 대학에 들어가서도 무슨

특권이라도 되는 양 남녀 친구들을 집합시켜 서울의 이름난 호텔 나이트 모두를 섭렵하기도 했다.

그런 호사스럽던 시절이 IMF가 오면서 뒤집어 졌다.

개념없이 인생을 즐기고자만 했던 내게 있어, 나라 전체에 경제적인 압박이 처해진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다니던

회사에서도 밀려났고, 당연히 생활의 어려움이란 것을 겪게 됐다.

 

철없는 시절, 향토 장학금이라 명명되던 지방 친구들의 용돈은 어렵사리 농사를 짓는 부모님들께서 허리띠를 졸라

매면서까지 그들의 유학 자금을 마련해 주었기로 가능했다.

뒤늦게 철이 들었기에 예전 일을 회상할수도 있는게지만..

아마도 대책없이 노는데만 정신이 팔려있던 그 모습들을 부모님들께서 지켜봤다면, 친구들의 멱살을 잡아 고향으로

끌어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젊은 시절, 우리 모두는 무모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양심의 꺼리낌조차 없는 철부지였다.

비슷한 또래 여러분 역시 공감하겠지만, 통키타를 포함한 막연한 문화의 범람은 철없는 우리들의 사고를 어느 틈엔가

비몽사몽 취하게 만들었고..

 

물론 모든 친구가 그랬던건 아니다.

자식들의 교육에 물불을 가리지 않던 부모님들 중에 끼니마저 걱정해야 되는 분들도 상당히 많았던 기억이다.

현 시점에 와 깨달은게지만, 당시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제 갈길을 간 친구들 상당수는 편안하게 노후를 맞을만큼

튼실히 자리를 잡았지만, 반면 부모들의 무한한 애정을 받으며 큰 놀새들은 아직도 허덕이는 이들이 부지기다.

돌이켜 보건대, 힘겨웠던 부모의 일상을 몸소 접했던 친구는 적은 돈이나마 아끼는 습성이 몸에 뱄을것이고, 큰

차이는 없다손 쳐도 다소 여유있는 용돈을 거머졌던 놀새들은 마냥 그 시절이 계속되리라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공평한지라 허리띠를 졸라맨 이들에게는 그 인내를 높이 사 풍족함을 가져다 줬고, 그 반대인 베짱이들에게는

그에 걸맞는 고난을 겪게 하는 것이리라.

 

아직 은퇴까지 할 나이는 아닌지라 돈에 대한 미련이 많을수 밖에 없기로, 조심스레 계획표까지 그려 본다.

한참 의욕있게 일해야 할 나이에, 그저 맘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타령만 부르며 도끼 자루 썩는줄 몰랐으니 여유로운

중년이 못 됨은 당연히 받아 들여야 하겠지만, 곁들여 후손이 되는 자식들의 씀씀이까지 어줍잖게 참견하고픈 생각까지

드는건, 아무래도 예전 방탕한 생활을 죄의식없이 보냈기에 쓸데없는 오지랖이 넓어 진 탓일게다.

세상이 많이 변했겠지만, 우리네 젊은 시절은 딸린 식구들을 먹이고 재울 집 한채를 마련하는 일에 모든 정성을 쏟았지

싶다.

그때의 사고방식과는 확연히 달라진 요즘, 격세지감이란 말이 떠 오르는건 나만의 조바심일까.

 

사회 구조가 핵가족으로 바뀐지 오래된 지금, 자식들의 생활비에 관심이 가는건 당연지사.

3인 가족으로 봤을때 한달 생활비는 50만원에서 500만원까지, 실로 그 차이는 엄청나다.

쉽게 얘기하자면, 근면한 삶을 사는 신혼 부부들은 아끼고 아낀 탓에 50만원으로도 충분히 가계부를 꾸려 나가지만

주위 돈 있는 친구에게 뒤지기 싫어 하는 일부 젊은이들은 분수에 맞지 않는 외제차까지 할부로 구입하는 통에

한달에 500만원이라는 큰 돈이 어이없게 사라지기도 한다.

맞벌이로 번다 한들 헛되이 낭비를 일삼는다면 안락한 노후는 장담할수 없을것이다.

뒤늦게나마 돈에 대한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인지, 과거 부모의 눈에도 비춰졌을 한심스런 그 시절이, 자식한테까지

대물림 될까 싶어 노파심이 인다.

근면함이 몸에 익어야 할텐데, 못난 애비의 전철을 밟을까 싶어 노심초사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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