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면서 가장 바쁜 일주일을 보낸 숙희다.
재윤이의 도움을 받아 넓은 집으로 이사도 했고, 수입고기의 무역업무는 진희의 첫사랑인 성식이의 회사에서 대행을
해 준다지만, 통관후의 업무를 배우느라 사무실의 미스김과 며칠동안 머리를 맞대는 중이다.
수입고기의 거래처를 확보하기 위해 재윤이의 소개로 영업사원을 뽑아, 매일 활동결과에 따른 보고도 받아야 했다.
이사를 하던 날에는 아들 동호녀석과 재윤이를 자연스럽게 만나게 해 줬는데, 아들녀석이 재윤이를 나쁘게는 보지
않는것 같아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다만 한가지 걱정이 되는것은 고기를 적재하는 창고를 결정해야 함에, 진희가 고태산의 창고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게
맘에 걸리는 중이다.
고태산과의 과거를 재윤이에게 고백은 했지만, 두 남자가 만나게 되는것이 결코 달가울수는 없는 일이다.
~ 나야, 몇시쯤 집으로 올거야.. ~~
사무실에서 상념에 잠겨 있는데 재윤이에게서 핸폰이 왔다.
" 오늘일은 다 끝났어, 왜 그러는데.. "
~ 왜는, 이 사람이.. 지금 동호랑 같이 있어, 조금 있다 옷장하고 침대가 들어오잖어.. ~~
바쁘게 일정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가구가 들어오는 날인줄 까맣게 잊었던 숙희다.
" 알았어요, 금방 갈께.. 배고프면 동호랑 뭐라도 시켜 먹든지.. "
그나마 재윤이가 이사를 도와주고, 챙기지 못한 업무에 대해서도 조언을 해주는 바람에 많은 도움이 된다.
이제서야 조금씩 살아가는 재미도 솔솔 느껴진다. 고태산에게서 생활비를 빌미삼아 그의 첩과 다름없이 살아가던
예전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만큼, 자유롭고 성취감까지 생기게 된 요즈음이다.
모든게 진희의 덕이기도 하지만, 재윤이가 자신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진희와 재윤과의 악연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지는 숙희다.
" 전부들 일찍 퇴근했나 보네.. "
사무실을 통해 오피스텔로 들어서자 태호가 혼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응, 숙희도 집에 정사장이 오기로 했다고 조금전에 퇴근했어.. "
" 아주 둘이서 깨가 쏟아지네, 버러지 같은 자식.. "
방금 전에 성음의 김종철이한테 무시를 당한것 같아, 안그래도 꿀꿀했던 기분을 완전히 망친 진희다.
시간이 나길래 김종철이나 만나 볼 요량으로 회사로 찾아 갔더랬다. 돌아올 배당금이 어느정도나 될른지 들어본 후에,
잠깐이나마 종철이와 회포를 풀 작정이었다.
당연히 회장실로 안내를 해야 할 비서가 선약이 없으면 곤란하다며 문전에서 가로막았다. 회장에게 인터폰을 하라고
해도 비서는 차갑게 도리질만 해 댔다.
" 왜 그래, 기분이 안좋아 보이네.. "
" 건드리지 마, 지금 기분이 엉망이니까.. 술이나 가져와.. "
여지껏 남자에게서 일방적인 홀대를 당해보지 않던 그녀였다. 수많은 남자들이 자신이 불러 주기만을 길게 목을 빼고
고대하곤 했었는데 이런 무시를 당한것이다.
" 무슨 일인지 내가 알면 안되는거야? "
쇼파사이에 있는 간이 탁자에 양주와 간단한 안주를 내려놓은 태호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 글쎄, 김종철이 놈이 날 문전박대를 하더라니까.. 참 기가 막혀서.. "
조금전에 겪은 일을 태호에게 얘기를 해 주면서 술로 화를 삭이는 진희다.
" 그럴리가 없을텐데.. 아마도 회장실에 곤란한 손님이 와 있었을거야.. "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직접 찾아갔는데.. "
" 아닐거라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비서한테 보고를 받으면 금새 연락이 올테니까.. "
딴에는 풀어준다고 애를 쓰는게지만, 한번 응어리진 울분은 쉽사리 풀리지가 않아 연거푸 칵테일을 들이 부었다.
" 정사장도 너무 미워하지마, 자기 딴에는 나름 열심히 마님한테 잘 보이려고 하던데.. "
" 어쭈, 점점.. 조심하라고 그랬지, 그러다 혼나는 수가 있어.. 오냐오냐 해 줬더니 별 참견을 다 한다니까.. "
가뜩이나 맘이 편치 않은데다가, 생각해 준답시고 훈계까지 하는 태호땜에 심사가 배배 꼬인다.
"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는거지, 그래야 마님 정신건강에도 좋을테구.. "
" 까불지마, 넌 내 강아지야.. 어디서 감히.. "
자꾸만 속을 긁어대는 태호를 상대로 스트레스나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쳐 든다.
" 안되겠어, 버릇없이 주인마님의 말씀에 토나 달고.. 이리와서 무릎 꿇어, 단단히 교육 좀 시켜야지.. "
발치께에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은 태호의 뺨을 있는 힘껏 갈겨 버렸다. 뺨을 맞은 태호가 움찔할 정도로 아픔을
느꼈겠지만, 때린 진희의 손에도 짜릿하니 통증이 온다.
태호에게 분풀이를 하고자 했지만, 삐뚤어진 기분은 풀리질 않고 오히려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 안되겠어, 내 손만 아파서.. 채찍 가져와.. "
언더락스 잔에 독한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부어 마신후에, 태호가 건네준 채찍을 들고 크게 심호흡까지 하는 진희다.
여전히 발밑에 조아리고 있는 태호를 상대로 미친듯이 채찍을 휘둘러 갔다.
온 몸의 힘이 빠져서 지칠때까지 매질을 가한 후에야 조금은 분이 풀리는 느낌이다.
한동안 거친 몸짓으로 인해 턱까지 차 오른 숨을 고르고 있는데 핸폰이 울린다.
~ 누나.. 물어볼 말이 있어서.. ~~
호스트바의 제임스다. 정숙이에 관한 보고일거라 짐작했지만 제임스의 말은 전혀 예상밖이다.
~ 정숙이 누나 딸에 대해 알아요? ~~
" 아니, 잘 몰라.. 딸이 있다고 얘기만 들었지.. "
~ 걔가 미정이라고.. 먼저번에 정숙이 누나 집에 데려다 줄때 한번 봤는데, 자꾸 놀러오네.. 누나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전화한건데, 건드려도 괜찮겠어? ~~
제임스의 말대로라면 웬수같은 재윤이에게 심적인 고통을 안겨줄수 있을듯도 싶어 작은 희열이 일어난다.
" 잘할수 있겠어? 니 말이라면 뭐든지 시키는대로 하게끔 만들수 있겠냐구.. "
~ 누나도, 참.. 내 실력을 몰라서 하는 소리유? 걱정 붙들어 매요, 나 아니면 못살겠다고 할만큼 만들어 놀테니까 ~~
" 중간중간 보고 하는거 잊지 말고.. 그래.. "
제임스와 통화를 끝낸 후, 응어리진 마음이 조금은 개운해 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진희다.
그제서야 쇼파 앞에 널브러져 고통스럽게 웅크리고 있는 태호의 알몸이 눈에 들어온다.
" 많이 아퍼? 그러길래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나서니, 나서길.. "
뒤늦게 후회가 밀려 왔지만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어깨며 허벅지, 넓은 등짝까지 어느 한곳 성한곳이 없을만큼
온 몸에 시뻘건 혈흔 투성이다.
비록 변태적인 기질로 바뀌어 메조와 새디가 되긴 했지만 진정으로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이다.
거실에 있는 장식장에서 약품 상자를 꺼내 연고 하나를 찾아서는 태호의 몸에 발라 나갔다.
" 괜찮어, 오랜만에 흠씬 맞았더니 시원하네.후후.. "
웃고있는 태호의 눈두덩이도 채찍에 스쳤는지 퉁퉁부어 몰골이 말이 아니다.
애잔한 마음이 드는 진희가, 태호의 얼굴을 감싸안아 허벅지 위에 올리고선 상처를 쓰다듬어 갔다.
" 빨리 고쳐야지, 나도 더 이상 힘들어.. "
" 너무 마음쓰지마, 어디 하루이틀 일인가.. "
" 몰라, 나도 자기를 때리는게 짜릿해 진단 말이야.. 나까지 변태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
태호의 알몸을 보듬어가며 바르는데, 어느새 연고를 쥐어짜야 할만큼 상처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