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일까지 정사장님 계좌로 집어 넣으면 되죠? "
" 그렇게 해 주세요.. 급한건 아니니까.. "
대출을 받으러 거래은행에 들린 재윤이다. 1억을 대출받아 숙희에게 넓은 집을 구해 줄 요량이다.
" 요즘에 집에 돈 들어갈 일이 많은가 봐요, 사모님 명의로 되어있는 건물도 따로 대출을 받으시고.. "
" 대출이라니.. 난 모르는 일인데.. "
" 어제 사모님께서 5천만원을 대출받아 가셨는데 모르셨어요? "
백만원이 넘어가는 지출이 있을때는 자신에게서 허락을 받아 타서 쓰던 정숙이다.
여지껏 한번도 자기 마음대로 큰 돈을 써보지 않던 아내가, 자신에게 한마디 의논도 없이 대출을 받았다는 은행직원의
귀뜸이다.
바람을 피다 들킨죄로 자신의 명의로 되어있던 상가를, 아내인 정숙이의 명의로 돌린 탓으로 제 멋대로 대출을 해 간
폭이다.
며칠전에 처 이모에게 돈을 빌려줬으면 좋겠다는 아내의 말이 떠 오른다. 보나마나 처이모 아들이 한다는 사업에
돈을 쳐 넣었을 것이다.
그렇게도 신신당부를 했건만 처조카에게 돈을 빌려준 정숙이가 못 마땅하다.
은행을 나오자 마자 당장에라도 집에 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숙희와 같이 새로 이사갈 집을 보러 가기로 약속을 한
탓에 억지로 화를 삭이는 재윤이다.
차를 몰고 대방동의 부동산 사무실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해 있던 숙희가 일어서서 반긴다.
" 조금 늦었네, 바쁜일이 있으면 천천히 하지 그랬어.. "
넓은 집으로 이사를 시켜 준다고 하자 며칠간을 미안해 하던 숙희다.
" 아냐, 중간에 어디 좀 들리느라고.. 그 빌라가 신축이면 당장에 들어가도 되겠네요.. "
" 네, 잔금만 치루면 언제라도 이사할수 있습니다.. "
부동산업자가 보여준 신축빌라는 숙희가 지금 살고있는 연립보다 두배 가까이 넓어 보이긴 했다.
어저께 혼자 와서 대충 둘러보긴 했지만, 숙희가 맘에 들어할지 직접 보여주고 싶어 만나기로 한 것이다.
" 이 사람이 보고서 맘에 들어 하면 당장 계약합시다.. "
그 시간, 정숙이는 강쇠와 함께 논현동의 자동차 대리점에서 새차를 고르는 중이다.
남편한테 거짓 핑계를 댈지언정 강쇠에게 약속한 새차를 뽑아주기 위해 대출까지 받은 정숙이다.
" 누나 ~ 이 차 어때.. 난 마음에 드는데.. "
" 잘 보셨네요, 등급도 2500짜리라 힘도 좋고 승차감도 아늑하죠.. "
대리점에서 졸고 있던 영업사원이, 졸지에 차를 팔아 치울수 있다는 감이 오는지 옆에 둘러붙어 설명이 구구하다.
" 내가 뭘 아니, 니 맘에 드는걸로 해야지.. "
" 에이 ~ 누나는.. 차 값이 만만치 않으니까 그렇지.. "
진희에게 듣기로는 큰 돈을 맘대로 쓸수있는 처지가 아니라고 들었기에 정숙이의 의향을 묻는것이다.
" 절대로 비싼 가격은 아닙니다, 옵션을 포함해도 3200이면 되걸랑요.. 누님께서 그 정도 예산이야 하셨겠죠.. "
" 그래, 그럼 이걸로 해.. 새 차 나오면 가끔 나도 태워주고.. "
" 고마워, 누나 ~ 차는 언제 나오죠? "
" 한 보름정도 걸립겁니다.. 요즘에 이 차가 인기가 많아서 한달은 기다려야 하지만, 제가 특별히 빨리 뽑아 달라고
본사에 연락을 취해 놓겠습니다. "
대리점 직원 신분으로 힘을 쓰겠노라고 호언장담까지 한다.
" 계약금은 지금 드릴테니까 빨리 나오게나 해 주세요.. "
" 염려하지 마십시요, 확실하게 제 날짜에 맞춰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
직원이 내주는 서류에 사인을 하고는, 폰뱅킹으로 계약금을 입금시키고 나서야 대리점을 나섰다.
" 누나가 아직 점심을 못 먹었는데 같이 먹어도 되겠어.. "
이미 집을 나서면서부터 두 녀석과 뜨거운 시간을 보내리라 마음 먹었던 정숙이다.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만큼
그에 걸맞는 서비스를 받는게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 당근이지, 오늘은 내가 쏜다.흐흐.. "
비싼차를 선물로 받은 강쇠의 얼굴 가득, 득의에 찬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 이왕이면 경치 좋은데로 갔으면 좋겠다.. 미사리 쪽에 좋은 카페가 많다면서.. "
" 오케이 ~ 원하는게 있으면 뭐든지 말만 해, 누나가 하자는대로 다 해줄께.. "
시원하게 뚤린 올림픽 대로를 따라 운전을 하면서 휘파람까지 불어대는 강쇠다.
" 친구가 차를 사는데 제임스는 뭐하느라 못왔어, 혹시 너만 사 줬다고 삐진거 아냐.. "
" 그런건 아니고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나가드라구.. "
" 여자친구라.. 그 여자도 제임스가 술집을 하는걸 아나.. "
여자들을 상대로 몸까지 파는 직업을 가진 남자를 어느 여자든지 좋아하기는 힘들거라는 생각이 스친다.
" 글쎄, 그거야 모르지.흐흐.. "
" 오빠가 하는 사업이 뭔데.. "
정숙이가 강쇠와 올리픽 대로를 달리는 시간에 미정이는 제임스와 카페에 마주앉아 커피를 마시는 중이다.
화창한 날씨에 학원에 틀여 박혀있는 자신이 무료하던 차에, 몇일전 집에 왔던 제임스가 생각나 핸폰을 했다.
제임스가 자신의 사업장이 있는 강남으로 오라고 했기에, 지리를 몰라서 노량진에서부터 택시까지 타야 했다.
" 그냥 조그만 술집이야, 먼저 같이 갔던 강쇠하고 동업을 하거든.. "
" 오빠들은 경험도 없을텐데 벌써부터 술집 같은걸 하냐, 그런건 나이가 많아야 하는거 아닌가.. "
미정이는 엄마인 정숙이가 제임스의 고객인걸 알리없는 순진한 학생일 뿐이다.
제임스가 정숙이를 집에다 데려다 주면서 만난 미정이에게 무심코 핸폰 번호를 건넸는데 오늘 전화를 받은것이다.
"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장사만 잘하면 되지.후후.. "
" 장사가 잘된단 말이지, 무슨 술집인데 그렇게까지 잘돼.. 락카페 같은거야? "
" 그 비슷한거야, 그건 그렇구 뭐 먹고 싶은거 있으면 말해라.. "
멀리까지 찾아온 성의를 봐서 맛있는거라도 먹여 보낼 생각이다.
" 그럼 나 술한잔 사주라.히히.. "
" 너 술도 마시냐, 쪼그만게 공부는 안하구.. "
" 친구들이랑 가끔.. 그리고 나 주민증 나온 성인이거든.. "
제임스가 종업원을 불러 작은 맥주 두개를 시킨다. 여러번 마셔본 듯 손으로 따서 건배까지 하잔다.
" 성인은 무슨.. 아직 멀었어, 임마.. "
" 어 ~ 오빠가 날 무시하네, 이래뵈도 친구들이랑 안 가본데가 없어.. "
" 그런데야 누구나 다 가는거구, 임마.. 그래, 남자친구는 있냐? "
" 당근이지.. 내가 이쁘다고 쫒아다니는 애들이 한 트럭이 넘어.. "
" 에고, 그러셔.. 그러면 애인이랑 잠도 자 봤겠네.후후.. "
" 말이라구, 내 친구중에 숫처녀는 하나도 없어.. 누가 촌스럽게 그런걸 달고 다녀.. "
하기사 제임스 자신도 고등학교 다닐때 옆집사는 누나한테 총각딱지를 뗀 기억이 있다.
당시 룸싸롱에 다니던 연상의 여자한테 찍혀 성에 대해 눈을 떳던 것이다.
미정이와 마주하고 있자니 잠시 예전의 추억에 잠기는 제임스다. 부모가 맞벌이를 한답시고 자신을 자유롭게
내 버려두는 통에 여기까지 오게 된것이라 생각하니, 미정이도 어긋나기 쉽겠다는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엄마인 정숙이가 가정을 등한시하고 쾌락을 쫒아 다니는데, 딸인 미정이도 잘되긴 힘드리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