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알몸으로 뒹굴어서일까, 평소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재윤이가 남 같지 않다.
진희가 자신에게 힘든 경험을 시킨 재윤이를 벼르고 있는 시점에 그와 몸을 섞게 되어 약간은 혼란스럽다.
숙희의 밑에서 무릎을 꿇고 젖은 수건으로 자신이 뿌려놓은 흔적을 닦고 있는 재윤이다.
재윤이와의 일도 진희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입장이다. 물론 사무실의 중요한 일은 재윤이에게는 비밀이다.
" 숙희씨도 멋진 몸매를 가졌어, 자주 만나자구.흐흐.. "
자신이 처한 입장도 모르면서 그저 섹스만을 생각하는 재윤이가 어리석어 보인다.
" 다른 사람이 있을때는 이름을 부르면 안돼요, 진희나 태호씨가 눈치를 채지 못하게 해야 하니까.. "
" 여부가 있나요, 나도 숙희씨와 깨지는건 싫은데.. "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저 두고 볼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진희가 자신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준것이고, 재윤이는
이제 처음으로 몸을 섞은 유부남일 뿐이다.
그 역시 자신의 삶에 어떤 혜택을 가져다 줄지 알수 없는 일이다.
" 숙희씨 집은 어느쪽이야? "
" 그건 알아서 뭐하게, 아들이랑 살기땜에 우리집에 찾아오면 안돼요.. "
고태산과도 아는 사이라고 진희가 알려 줬다. 행여 둘이 마주쳐서는 안될 일이다.
" 그냥.. 혹시 알어, 특산품이라도 사 주고 싶은데 택배 보낼 일이 있을지.. "
" 우리집이 좁아서 뭘 가져다 놀수도 없네요, 말이라도 고맙긴 하네.. "
그나마 마음씀이 고태산보다는 후덕하지 싶다. 가지고 있는 재산이 많은 고태산은 한달마다 챙기는 생활비 외에는
추가로 지불하질 않았고, 작은 선물하나 건네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재윤이는 자신의 힘이 닿는대로 퍼 주는 사람이라고 그의 와이프가 일러준게 기억이 난다.
" 그럼 이쁜 옷이라도 하나 사줄까? "
마음에 와 닿진 않지만 그가 어느정도로 나에게 해 준다는 건지 호기심이 발동한다.
" 김치 냉장고가 없어서 불편하긴 한데, 워낙에 집이 좁아서.. "
" 살고 있는 집이 몇평이길래 작은 냉장고 하나 들여 놀데가 없을꼬.. "
시간이 지나 정재윤이 새벽시장으로 나가고, 대충 집안을 정리한 숙희는 진희의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점심시간이 넘어 진희가 사무실에 출근을 했다.
미스김에게 의례적인 보고를 받은 진희와 오피스텔로 들어선 숙희가 엊저녁 재윤이와의 일을 털어놓았다.
" 그래, 그건 좋은일이네.. 물론 두고봐야 알겠지만 숙희한테 호감을 가진게 나쁜일은 아닐듯 싶어. "
의외로 별게 아니라는 진희의 태도에 안심이 된다. 진희답게 섹스에 대해서는 열린 생각을 가졌다.
" 난 괜한짓을 한게 아닌지 께름칙 했어. "
" 그럴거 없어, 내가 정사장에게 받은 수모를 돌려주는거와 숙희는 상관이 없잖어.. 그냥 모른척하고 정사장이
주는대로 받아도 될거야. "
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태호가 현관을 들어선다.
" 에구 ~ 우리 마님이 오랜만에 잠을 푹 주무셨는지 얼굴이 활짝 피었습니다, 그려.후후.. "
" 내가 언제 자기 눈에 밉게 보인적도 있나, 그건 그렇고 회사일은 다 보고 온거야? "
" 응, 대충.. 근데 정사장 와이프가 또 전화가 왔네, 지금 정사장은 새벽시장에 다녀왔다고, 아침나절에 들어와서는
집에서 자고 있다는데 나한테 할말이 있다면서 지금 이리로 나오겠다고.. "
자신의 남편과 몸을 섞은 여자가 이곳에 둘이나 있는지도 모르고, 남편의 외도를 막아보겠다는 정사장의 와이프가
한심해 보인다.
" 사무실로 오지 못하게 하고 밖에서 만나서 무슨 일인가 물어봐. "
셋이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중에 정사장의 와이프가 도착을 했는지, 핸폰을 들여다 보던 태호가 오피스텔을
나선다.
" 내가 요즘에 눈코 뜰새도 없이 바뻐.. 어때, 사무실 일도 별거 아니지? "
" 도움을 주고 싶어도 워낙 일을 모르니까 좀 그래.. 그냥 자리에 앉아 있는거지, 뭐. "
" 그것만 해도 어딘데, 차츰 익숙해 질거야.. 모르는게 있으면 성식이나 철호 사무실에 전화하라구, 친절하게 가르쳐
줄거야.. "
그 때 태호의 전화를 받은 진희가 침실로 들어가더니, 한참후에 통화를 끝내고 나온다.
" 일이 재밌게 되어가네, 자세한건 나중에 얘기 해 줄께.. "
옷을 갈아입은 진희마저 오피스텔을 빠져나간다.
" 그러니까 진희가 지금 정사장 와이프와 술을 마시고 있단 말이죠. "
저녁이 되어 오피스텔로 돌아온 태호가 바깥에서의 일을 설명해 준다.
정사장의 와이프인 정숙이가 처음에는 자신의 남편이 그동안 바람을 피면서 재산을 날린 얘기를 하면서 신세한탄을
하더니, 어느정도 술이 거나하게 오르자 태호에게 추파를 던지더란다.
안되겠다 싶어 진희에게 연락해서 구원을 요청할수 밖에 없었고, 셋이서 같이 술을 마시다가 진희가 사무실로
돌아가라고 해서 왔다는 것이다.
" 아니, 자기 남편이 바람을 펴서 많은 재산을 날렸다고 길길이 뛰는 여자가 뭐하는 짓이래.. 그럴수록 야무지게 집안
단속을 해야지, 외간 남자를 유혹해서 어쩔려구.. "
하기사 숙희 자신이 봐도 젊어서부터 시장을 떠 돌아 다닌 정재윤보다는, 어릴때부터 부유하게 자라 품위가 몸에 밴
태호에게 맘이 끌리는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남편과 똑같이 맞바람이라도 핀다면 집안꼴이 어찌 될 것인가.
재윤이가 신혼시절에 와이프의 불륜을 목격했다는게 사실이었음이 밝혀진다.
" 마님이 무슨 생각으로 정사장 와이프하고 같이 있겠다는건지 이해를 못하겠네.. 정사장이 오더라도 와이프가
이곳에 왔다는 얘기를 해주지 말라는거야. "
진희가 무슨일을 꾸미는건지 알수는 없지만 숙희로서는 그저 따라가면 될 것이다.
" 커피라도 한잔 드릴까요. "
둘이서 있기도 객적어 태호에게 말을 시켰다. 아직도 둘만 남겨진게 어색하다.
" 그냥 둬요, 조금 있으면 정사장도 올텐데 술이나 한잔 더 마시게.. "
태호의 말이 끝나자 현관의 차임벨이 울려 숙희가 문을 열어주니, 정사장이 빙긋이 웃으며 들어선다.
" 확실히 정사장은 양반이 못 되는구만. 후후.. "
" 형님, 치사하게 내가 없는 자리에서 흉이나 보면 안되지.. "
" 흉은 무슨, 객적은 소리 말고 오늘은 정사장이 술상이나 차려 봐. "
" 근데, 양주말고 소주로 마시면 안될까요.. 나는 그 양주라는게 영 맞지를 않아서리.. "
한가지를 보더라도 태호와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다. 양주와 소주를 두고 비교를 할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 자체가 틀리다.
태호 같으면 상대의 의견을 따라주는걸 예의로 아는 사람이고, 재윤이는 자신의 감정을 우선시해서 남이 자신을
따라주기를 바라는 쪽이다.
" 맘대로 해, 나야 상관없지만 숙희씨가 좋아하는 걸로 가자구.. "
결국 소주를 마시기로 결정을 하고서는, 그럴듯한 안주를 사오겠다며 재윤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진희가 그러던데.. 숙희씨하고 정사장이 애인 사이로 발전할지도 모르겠다고.. "
자신과 재윤이의 얘기를 진희가 태호에게 한 모양이다. 태호에게 끌리는 마음이 있었지만 언감생심 쳐다볼
상대가 아니라서 그저 바라만 보던 숙희다.
그런 그에게 못 볼 꼴을 들킨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못하다.
" 글쎄요, 아직 뭐라고 얘기하긴 좀 그래요. "
" 꼭 어떻게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정사장이 좋아라 한다면 그냥 받아주는 대신에, 숙희씨의 가치를 높게
인정 받으라구.. 고사장처럼 숙희씨를 우습게 보지는 못하게 해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