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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섹스의 화신 김개똥과 광해군

바라쿠다 2015. 4. 20. 09:37

 

  • 섹스의 화신 김개똥과 광해군

    박대받던 광해군과 노비 출신의 그녀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E-mail : dschang28@hanmail.net
    서울서 성장해 경기고와 한국외국어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예탁결..
 
입력 : 2015.03.09 09:17 | 수정 : 2015.03.09 09:24   
노비 출신의 애인에 홀려 놀다가 왕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

조선의 27명 왕들 중 재위 중에 반정으로 폐위되어 묘호(廟號:왕의 사후 붙이는 호로 태조, 세종 등)를 못 받은 연산군과 광해군이 있다. 두 왕들 모두 여인들 때문이었다. 연산군은 장녹수에게 광해군은 김개시에게 놀아나다가 반정 세력에 의해 쫓겨났다.

장녹수와 김개시 모두 다 천민 신분으로 궁에 들어와 지존의 왕을 마음대로 주물렀던 여인들이었으나 결코 미인들은 아니었다. 이 두 여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종이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평생 종의 신분으로만 살아야 했다. 미인이 아닌 그녀들이 왕과 처음 마주쳤을 때 떠오르는 것은 왕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왕을 성적 테크닉으로 사로잡은 후에 왕을 이용해 종의 신분을 벗어나 종살이에 대한 한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녀들에게는 왕의 인간성보다 왕의 권력이 더 필요했다.
조선 15대 왕 광해군
조선 15대 왕 광해군

외로운 광해군에게 나타난 여인 김개똥, 부왕에게도 총애 받아

광해군은 부왕 14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1575년 태어났는데 3세 때 모친이 사망했다. 모친 사망 후 선조는 인빈 김씨 등 여러 후궁들에게 빠져 어미 없는 아들 임해군과 광해군을 박대하고 곤경에 빠뜨리곤 하여 그들은 왕자이지만 외롭고 힘들게 자랐다. 임해군의 비뚤어진 성격도 그 원인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외롭고 고단한 광해군에게 위로를 해 줄 수 있는 동궁전의 궁녀 김개시가 나타났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그녀의 입궁 시기는 1600년 전후 즉 광해군이 26세 전후 때이다. 김개시는 영민한 것은 물론 글도 읽고 문서 처리도 잘 해 젊은 세자 시절 때부터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 개시(介屎)에서 시(屎)는 똥이란 뜻이니 개똥이라는 이름이었다. 광해군 일기에 “김개시의 용모는 나이가 들어서도 펴지 않았으나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미인은 아니나 꾀가 많았다. 애교와 서비스가 뛰어나 부왕에게도 총애를 받은 그녀를 사랑하면서부터 광해군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조일전쟁(임진왜란)으로 세자 되고 전쟁에 공 세워 부왕이 시기해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자녀가 없었는데 후궁들에게서는 13명의 왕자들이 있었고 광해군은 서차남이었다. 광해군이 18세 되던 1592년에 조일전쟁(임진왜란)이 발발하였는데 선조는 수도 한양과 백성들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선조가 총애하던 인빈 김씨의 소생 신성군은 피난길에 죽었고 서장남 임해군의 성격이 포악하여 피난 도중 평양에서 행실이 모범적이었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가 된 광해군은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부왕과 달리 평안도와 황해도, 전라도 등에서 의병을 모집하면서 민심을 수습하는 등 분조활동을 잘 해 백성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선조는 조선 왕조에서 최초로 정비의 아들이 아닌 서자(덕흥대원군: 중종의 후궁 창빈의 아들)의 아들로서 왕이 되어 콤플렉스가 많았다. 이 방계 콤플렉스 탓인지 총명하고 전란 중 나랏일을 잘하여 백성들 평판이 높은 세자 광해군을 경계하고 냉대하며 괴롭혀 광해군은 부왕으로부터 한 맺히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

형제 사랑하라는 부왕 유언 받고 겨우 왕이 되어

선조는 정비 의인왕후가 사망한지 2년 후인 1602년 나이 51세에 서인 김제남의 19세 된 딸과 재혼했다. 새 왕비는 1606년 선조의 적장자가 되는 영창대군을 낳았다. 나이 50 중반에 꽃같이 아름답고 사랑스런 23세 젊은 부인이 낳은 아들이니 보고 또 보아도 예쁘고 이 세상 모든 것 다 주고 싶었다. 선조는 세자 광해군을 싫어하고 시기하였기 때문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다. 소북의 영수 유영경 등은 왕과 새 왕후의 마음을 읽고 영창대군으로 세자를 바꾸려 했으나 때 마침 선조는 지병도 있었고 선조의 귀여움을 받던 김개시가 그런 위기에서 광해군을 두둔하고 옹호했다.

1608년 1월 병세가 심해진 선조는 3살 난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 줄 수는 없었다. 영창대군 모친 인목왕후도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57세의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니 형제를 사랑하라는 유서를 쓴 후 약밥을 먹고 갑자기 사망했다. 김개시와 이이첨이 한 짓이라고 소문이 돌았으나 다음 날인 1608년 2월 2일 광해군은 34세에 왕위에 올랐다.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유영경은 곧 사약을 받았고 이제 세상은 김개시와 대북(大北)의 우두머리 이이첨의 것이 되었다. 김개시와 이이첨은 연인 사이라고 추문이 날 정도로 자주 만났다. <2편 계속 읽기>
조선 14대 왕 선조, 인목왕후와 영창대군
조선 14대 왕 선조, 인목왕후와 영창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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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 동생 무차별 살육…미인은 아니었으나 방중술 뛰어났던 김개시에게 빠진 광해군


대동법 등 실시해 민심 달랬으나 형, 동생 및 조카 죽이고 계모 가둬

<1편에서계속>
왕이 된 광해군은 전쟁으로 파괴된 국토와 민심을 복구하는데 공을 들였다.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완성하게 한 것은 물론 대동법을 최초로 실시하여 7년 전쟁으로 굶거나 병들어 죽어 가던 백성들부터 좋은 평을 들었다.

 


그러나 전란 후 궁궐 복구공사 등으로 인한 재정과 민생의 피해는 광해군의 실책이었다. 또한 명국에서 서장남인 임해군을 제치고 왜 서차남 광해군이 왕위 계승을 했냐고 따지자 임해군을 미친 자라고 명국에 알리고 역모죄로 몰아 강화 교동으로 유배 보내어 죽였다.

 

 

1613년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부친 김제남이 관련되었다고 조작한 역모사건(계축옥사)이 제보되어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 보냈는데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이 8살의 영창대군을 방에 가두고 거센 장작불로 방을 뜨겁게 달구니 어린 영창대군은 불덩이 같은 방안에서 살려달라고 발버둥치다 타 죽었다. 어린 아들을 비참하게 잃은 인목대비는 온몸이 갈래갈래 찢어지는 것 같아 통곡을 했다.

 


그리고 인목대비 부친 김제남(연안 김씨, 서인)과 김제남의 아들 셋을 죽였으니 인목대비는 광해군에게 풀 수 없는 원한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계축옥사 역모사건에 인목대비가 관련되었다고 보고되었다. 결국 1618년 광해군은 김개시, 유희분(왕의 처남), 이이첨 등과 함께 서궁에 가두었던 인목대비를 조선 최초로 대비에서 폐위시켜 어머니 자격을 박탈했다.

 


인목대비와 그녀 아들 영창대군이 비록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인물이라도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것)는 효(孝)를 통치의 근본으로 하는 조선에서 도덕적, 윤리적인 비난의 대상이었고 광해군의 정적인 서인들에게는 좋은 반정 명분이 되었다. 광해군은 이복동생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도 역모와 관련하여 죽였는데 능창군의 형 능양군이 동생 원수를 갚는다고 광해군을 내쫓는 반정 모의에 앞장섰다. 아래는 선조와 광해군 당시의 당쟁구도이다.
선조 및 광해군 당시 당쟁 구도
선조 및 광해군 당시 당쟁 구도
실리 외교에는 능했으나 섹스의 화신 김개시에 빠져

광해군은 조일전쟁(임진왜란) 후 망해가는 명국에 대한 의리를 선택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만주의 신흥세력 후금국과 친화하느냐의 곤란한 입장에 처해 있던 조선의 왕이었다. 그는 명국에 섭섭하지 않게 하고 후금국에도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함으로써 후금국의 침략을 모면하였다.

당시 조선은 7년간의 전쟁 후 흉년과 기근이 덮쳐 백성들은 먹을 것이 전혀 없어 사람이 생사람을 죽여 잡아먹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 때 광해군이 아래 그림의 서인들처럼 명국에 대한 사대와 의리를 고집했다면 만주를 통일하고 중국 본토를 넘보는 신흥 강국 후금국의 침략을 당해 조선은 그대로 붕괴되었을 것이다. 광해군은 실리의 양다리 외교로 후금국과 전쟁을 피한 탁월한 외교의 정치가였으나 이 실리 외교가 명국에 대한 의리를 저버렸다는 가장 중요한 서인의 반정명분이 되었다.
광해군 당시의 보수 서인 세력의 외교관
광해군 당시의 보수 서인 세력의 외교관
그러나 광해군은 외롭고 힘든 세자 시절부터 왕이 될 때까지 도와 준 김개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했다. 김개시는 머리가 좋아 광해군의 왕비 유씨의 마음에 들어 왕을 마음대로 모실 수 있었다. 김개시는 용모는 안 예쁜데 방중 섹스 기술만은 워낙 뛰어나 광해군을 완전히 품안에 사로잡았다. 위키 백과에 김개시는 부왕 선조와도 성관계를 한 궁인이라 했고 야사에는 광해군이 김개시와 잠자리 할 때 나이 많은 궁인이 힐책을 해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어쨌든 광해군은 김개시의 성적 매력에 흠뻑 빠져 그녀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꼼짝을 못했다. 또한 김개시는 단순한 광해군의 연인을 넘어서 국가의 모든 정사를 논하는 정치 동업자였다. 부왕과 성관계한 궁인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김개시에게 후궁 첩지를 주지 않았다. 김개시는 낮은 상궁의 위치에서 자유로웠고 말이 상궁이지 왕비보다 더 높았다. 권력의 맛을 본 김개시는 대북 세력의 실력자 이이첨과 한패가 되어 매관매직을 하며 온갖 뇌물을 받아 광해군 조정은 부패로 얼룩졌다. <3편 계속 읽기>
성적 비방에 뛰어난 김개시, “조선의 성과 문화”에서
성적 비방에 뛰어난 김개시, “조선의 성과 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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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시 뇌물 받고 광해군 팔아먹어

<2편에서 계속>

폐모살제(廢母殺弟)로 명분을 상실한 광해군은 역모가 발생하지 않나 하고 항상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반란의 모의자 중 김자점이 광해군의 여인 김개시와 연결 줄을 만들었다. 서인인 전 평산부사 이귀와 김자점 등의 반란 모의가 있다고 광해군에게 여러 번 보고되었다. 그 때마다 김자점이 김개시에게 뇌물을 바치며 후일을 약속 해주자 김개시가 받아들이고 광해군에게 반란 모의가 헛소문이라 하며 안심시켰다.

 


얼마 후 인조반정이 일어나는 1623년 3월 12일 김개시는 후원에서 술잔치를 벌이고 광해군에게 술을 먹였다. 그 때 이이반이 역모 고변을 했으나 광해군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늦장을 부리면서 수습에 임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광해군은 반란군이 대궐에 들어온 것을 알고서야 대궐 밖으로 도망가 의원 안국신의 집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강화도로 귀양 갔다. 고변한 이이반은 반정세력에 의해 처형당했다.

 


김개시는 새 정권의 공신이라 권력 참여를 기대하였으나 서인들은 반정 성공 다음날 반정의 명분을 위해 그녀를 죽였다.
김개시에게 뇌물을 준 인조 반정공신 이귀(좌)와 김자점(우)
김개시에게 뇌물을 준 인조 반정공신 이귀(좌)와 김자점(우)
광해군은 전란 때의 공적과 유연한 실리 외교 때문에 유능한 군주라는 평이 있다. 그러나 모략꾼이며 옹녀 같은 김개시에게 놀아나고 지지 세력인 대북파에 눌려 동생과 형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하는 폐륜을 저질렀다.

 


자기관리 엄격해야 경영에 성공해

 


정말 심각한 것은 역모 보고를 여러 번 받고도 애첩 김개시에게 완전히 속아 최고 권력의 자리를 허망하게 빼앗긴 점이다. 광해군은 유능하다기보다 불쌍해 보인다. 광해군은 자기보다 권력과 돈을 더 사랑한 정치적인 궁녀 김개시에게 철저한 배신을 당한 것이다. 광해군의 몰락은 최고경영자는 남자든 여자든 사랑한다면서 접근하는 사람들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것과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고 있다.

 


경영자들은 불륜 성관계는 물론 모든 자기관리에 엄격해야 경영에 성공할 수 있다. 내조든 외조든 그것을 핑계로 배우자에게 경영과 인사(人事)에 간섭 및 관여를 허용하면 조직은 혼란과 부패 속에서 헤매다가 방향을 잃고 결국 붕괴되고 만다. 그리고 경영자가 자기의 유력한 지지자들을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하면 그들이 내부의 적이 되어 경영자 자신과 조직은 실패한다는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출처 : 푸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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