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 출신의 애인에 홀려 놀다가 왕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
조선의 27명 왕들 중 재위 중에 반정으로 폐위되어 묘호(廟號:왕의 사후 붙이는 호로 태조, 세종 등)를 못 받은 연산군과 광해군이 있다. 두 왕들 모두 여인들 때문이었다. 연산군은 장녹수에게 광해군은 김개시에게 놀아나다가 반정 세력에 의해 쫓겨났다.
장녹수와 김개시 모두 다 천민 신분으로 궁에 들어와 지존의 왕을 마음대로 주물렀던 여인들이었으나 결코 미인들은 아니었다. 이 두 여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종이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평생 종의 신분으로만 살아야 했다. 미인이 아닌 그녀들이 왕과 처음 마주쳤을 때 떠오르는 것은 왕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왕을 성적 테크닉으로 사로잡은 후에 왕을 이용해 종의 신분을 벗어나 종살이에 대한 한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녀들에게는 왕의 인간성보다 왕의 권력이 더 필요했다.
조선의 27명 왕들 중 재위 중에 반정으로 폐위되어 묘호(廟號:왕의 사후 붙이는 호로 태조, 세종 등)를 못 받은 연산군과 광해군이 있다. 두 왕들 모두 여인들 때문이었다. 연산군은 장녹수에게 광해군은 김개시에게 놀아나다가 반정 세력에 의해 쫓겨났다.
장녹수와 김개시 모두 다 천민 신분으로 궁에 들어와 지존의 왕을 마음대로 주물렀던 여인들이었으나 결코 미인들은 아니었다. 이 두 여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종이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평생 종의 신분으로만 살아야 했다. 미인이 아닌 그녀들이 왕과 처음 마주쳤을 때 떠오르는 것은 왕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왕을 성적 테크닉으로 사로잡은 후에 왕을 이용해 종의 신분을 벗어나 종살이에 대한 한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녀들에게는 왕의 인간성보다 왕의 권력이 더 필요했다.
- 조선 15대 왕 광해군
외로운 광해군에게 나타난 여인 김개똥, 부왕에게도 총애 받아
광해군은 부왕 14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1575년 태어났는데 3세 때 모친이 사망했다. 모친 사망 후 선조는 인빈 김씨 등 여러 후궁들에게 빠져 어미 없는 아들 임해군과 광해군을 박대하고 곤경에 빠뜨리곤 하여 그들은 왕자이지만 외롭고 힘들게 자랐다. 임해군의 비뚤어진 성격도 그 원인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외롭고 고단한 광해군에게 위로를 해 줄 수 있는 동궁전의 궁녀 김개시가 나타났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그녀의 입궁 시기는 1600년 전후 즉 광해군이 26세 전후 때이다. 김개시는 영민한 것은 물론 글도 읽고 문서 처리도 잘 해 젊은 세자 시절 때부터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 개시(介屎)에서 시(屎)는 똥이란 뜻이니 개똥이라는 이름이었다. 광해군 일기에 “김개시의 용모는 나이가 들어서도 펴지 않았으나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미인은 아니나 꾀가 많았다. 애교와 서비스가 뛰어나 부왕에게도 총애를 받은 그녀를 사랑하면서부터 광해군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조일전쟁(임진왜란)으로 세자 되고 전쟁에 공 세워 부왕이 시기해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자녀가 없었는데 후궁들에게서는 13명의 왕자들이 있었고 광해군은 서차남이었다. 광해군이 18세 되던 1592년에 조일전쟁(임진왜란)이 발발하였는데 선조는 수도 한양과 백성들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선조가 총애하던 인빈 김씨의 소생 신성군은 피난길에 죽었고 서장남 임해군의 성격이 포악하여 피난 도중 평양에서 행실이 모범적이었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가 된 광해군은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부왕과 달리 평안도와 황해도, 전라도 등에서 의병을 모집하면서 민심을 수습하는 등 분조활동을 잘 해 백성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선조는 조선 왕조에서 최초로 정비의 아들이 아닌 서자(덕흥대원군: 중종의 후궁 창빈의 아들)의 아들로서 왕이 되어 콤플렉스가 많았다. 이 방계 콤플렉스 탓인지 총명하고 전란 중 나랏일을 잘하여 백성들 평판이 높은 세자 광해군을 경계하고 냉대하며 괴롭혀 광해군은 부왕으로부터 한 맺히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
형제 사랑하라는 부왕 유언 받고 겨우 왕이 되어
선조는 정비 의인왕후가 사망한지 2년 후인 1602년 나이 51세에 서인 김제남의 19세 된 딸과 재혼했다. 새 왕비는 1606년 선조의 적장자가 되는 영창대군을 낳았다. 나이 50 중반에 꽃같이 아름답고 사랑스런 23세 젊은 부인이 낳은 아들이니 보고 또 보아도 예쁘고 이 세상 모든 것 다 주고 싶었다. 선조는 세자 광해군을 싫어하고 시기하였기 때문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다. 소북의 영수 유영경 등은 왕과 새 왕후의 마음을 읽고 영창대군으로 세자를 바꾸려 했으나 때 마침 선조는 지병도 있었고 선조의 귀여움을 받던 김개시가 그런 위기에서 광해군을 두둔하고 옹호했다.
1608년 1월 병세가 심해진 선조는 3살 난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 줄 수는 없었다. 영창대군 모친 인목왕후도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57세의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니 형제를 사랑하라는 유서를 쓴 후 약밥을 먹고 갑자기 사망했다. 김개시와 이이첨이 한 짓이라고 소문이 돌았으나 다음 날인 1608년 2월 2일 광해군은 34세에 왕위에 올랐다.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유영경은 곧 사약을 받았고 이제 세상은 김개시와 대북(大北)의 우두머리 이이첨의 것이 되었다. 김개시와 이이첨은 연인 사이라고 추문이 날 정도로 자주 만났다. <2편 계속 읽기>
- 조선 14대 왕 선조, 인목왕후와 영창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