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만화
최초의 순수한 만화가는 김규택(金奎澤)이다. 그는 《신동아(新東亞)》 《별건곤(別乾坤)》 《조광(朝光)》지 등에 많은 단편만화와 만화 ·만문형식의 《억지춘향전》을 연재하여 세인의 눈을 끌었고 8 ·15광복 후에는 주간지 《새한민보》 표지에 시사만화를 연재하였다.
신문만화로는 1924년대에 노수현이 《조선일보》에 《멍텅구리》를 연재하였고 광복 후엔 김중현(金重鉉)이 때때로 잡지에 만화를 그리곤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어린이잡지 등에 소설삽화를 그리던 김용환(金龍煥) ·김의환(金義煥) 형제가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김용환은 《서울타임즈》에 《코주부》를, 김의환은 《어린이 나라》 등 어린이잡지에 많은 만화를 그렸다. 또 시인 김소운(金素雲)이 《만화행진》이라는 주간 만화신문을 발행하여 종래 만화란 어린이 전용의 것으로 여겨왔던 일반에게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으나 곧 폐간되었고 김용환이 《만화뉴스》를 발간했는데 《연합신문》에 만화를 기고하던 김성환(金星煥)과 신동헌(申東憲)이 이에 참여하던 중 6 ·25전쟁이 일어났다. 피난지에서 박성환(朴聖煥)이 《만화신보》, 김용환이 《만화신문》, 김성환이 《만화승리》를 제작하는 등 주간 만화신문이 잠시 활기를 띠었다.
환도 후엔 김성환이 1955년부터 《동아일보》에 《고바우영감》을 연재하고(80년도에 조선일보로 옮겨 연재하다 현재는 文化日報에 연재중), 곧 이어 안의섭(安義燮)이 《경향신문》에 《두꺼비》를 연재했다가, 《문화일보》에 연재했으며 정운경(鄭雲耕)의 《왈순아지매》가 《대한일보》 《경향신문》을 거쳐 《중앙일보》에 연재 중이며 백인수(白寅洙)의 《사회희평》이 《동아일보》에 연재 중인 것이 신문만화로선 장기간의 연재물이다. 신문 ·잡지엔 김일소(金一笑) ·김경언(金庚彦) ·길창덕(吉昌悳) ·박기정(朴基禎) ·임창(林創)이 그려온 한편, 오룡(吳龍)이 《조선일보》에 《야로씨》를, 윤영옥(尹暎玉)이 《서울신문》에 《까투리여사》를 연재했다.
환도 후의 아동만화계에는 만화잡지가 붐을 일으켜 이상호(李相昊) ·정한기(鄭漢基) ·박기준(朴基埈) ·김정파(金靜波) ·신동우(申東雨) ·김종래(金鍾來) ·박현석(朴賢錫) 등이 활약했으나, 얼마 후엔 잡지시대에서 대본소용 단행본시대로 접어들어 많은 조제품이 남발되어 사회문제화되기도 하였다. 또한 《소년세계》 《새벗》 《학원》 《학생계》 등에는 안의섭의 《두꺼비 A ·B곡》, 김성환의 《꺼꾸리군 ·장다리군》 《세모돌이 ·네모돌이》 《소케트군》 등이 연재되었다.
또 신동헌은 최초로 장편만화 《홍길동》을 제작상영함으로써 만화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이어서 《호피와 차돌바위》로 이어졌으나 기업으로까지 성장하지는 못했다. 김종래의 극화 《도망자》 《암행어사》에 이어 고우영(高羽榮)은 극화 스타일로 꾸준히 《일간스포츠》지에 《임꺽정》 《일지매(一枝梅)》를 연재했고, 이두호의 《머털도사와 또매》 《장독대》, 방학기의 《바람의 파이터》 등은 무술극화를 정착시켰고, 박수동(朴水東)은 독특한 선으로 《고인돌》을 《선데이서울》 등에 장기간 연재하였다. 《엄마찾아 3만리》의 김종래, 《라이파이》의 김산호의 단행본 시대를 거쳐서 각 일간지들은 어린이와 중학생 상대로 《소년조선일보》 《소년동아일보》 《소년한국일보》를 발행했는데 김박(金博) ·김세환(金世煥) ·김삼(金森) 등이 참여하였다. 《동아일보》에 이홍우(李泓雨)가 《나대로선생》을, 《일간스포츠》에 허어(許漁)가 《미스터 펀치》를 연재하였다.
어린이잡지에서는 김수정이 《아기공룡 둘리》로 명성을 얻었고 주간만화잡지와 스포츠신문에서는 이현세의 《까치》 시리즈와 《로보트 태권 V》의 김형배, 《변금련》의 배금택, 《악동이》의 이희재와 《각시탈》의 허영만, 《신손자병법》의 한희작, 이진주의 《달려라 하니》가 유명하다. 단체로는 1958년 김용환 ·신동헌이 주도한 한국만화가협회와 김성환 ·안의섭이 주도한 현대만화가협회가 각각 만화가협회전과 문화단체와의 야구경기 등 행사를 많이 해왔으나, 5 ·16쿠데타 후에 와해되었고, 68년 아동만화가협회가 이상호를 회장으로 발족된 후, 77년 극화분야와 어린이신문 관계 만화가까지 망라하여 만화가협회로 개칭되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겨레신문》이 발행되면서 박재동의 《한겨레그림판》과 《경향신문》의 김상택의 《시사 희평》이 유명하고 《한국일보》의 심민섭의 《심마니》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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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칠십년대 만화방
요즘 처럼 볼거리 놀거리가 많치 않턴 시절...
디지탈은 커녕 , 아날로그의 문명도 제대로 혜택을
받을수 없었던 그 시절 우리에겐 만화가 유일한
모든것이었다. 박기정,김종래,박기당, 박기준, 임창,엄희자...
그시절 대단한 만화작가들이 엮어내는 만화속에 빠져
울고 웃고.... 그 여리고 순수했던 동심을 키워나갔다.
대본소에서 만화를 직접 보기 보단 집으로 빌려왔다.
온가족 형제들이 잽싸게 보고 , 이웃 친구들과 또 돌려서
바꿔본다. 반환기일까지 두세차례 그렇케 바꿔보곤 하였다.
그러다 본의아니게 기일을 넘긴다거나, 책을 분실하여
주인한테 야단을 맞고 변상하던 일도 생겼다.
또한 만화를 빌릴때마다 한장씩 주는 티켓을 한 열장정도
모으면 만화방에서 TV를 그냥 볼수 있었다.
만화방에서 TV... 김일의 레스링...타잔, 전투, 황금박쥐...
... ...
그런데 왜 요즘아이들이 그때아이들 보다
더 불쌍하다고 생각이 드는걸까?
출처:http://blog.empas.com/djhan93/13218343 |
출처 : 세월따라
글쓴이 : 세월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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