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람

[스크랩] [첫 여성 독립기념관장… `윤봉길 의사의 장손녀` 윤주경씨]

바라쿠다 2015. 3. 7. 20:52

"할아버지 팔아먹는 양 비칠까 봐…

                            내 입으로 '윤봉길 손녀' 말한 적 없어"


"역사는 정확히 기록하되 '친일파 후손'이라고 해서 사회에 기여하는 걸 낙인찍고 막아선 안 돼"

"일제강점기 때는 '나쁜 집안'… 光復이 되자 '훌륭한 집안'
세상 바뀌니 평가가 달라져…우린 이런 세태가 무서웠다"

"저는 '자연인(自然人) 윤주경'이 아닌 '누구의 손녀'로 사는 걸 원치 않았어요. 주위에서 수군거려도, 내 입으로 '우리 할아버지는 누구다'고 말해본 적이 거의 없었어요. 그 사실을 드러내놓고 싶지 않았지요."

'윤봉길 의사의 장손녀'인 윤주경(55)씨가 독립기념관장에 취임했다. 역대(歷代) 열 번째 독립기념관장이고 여성으로는 처음이다.

그런 역사적 '무게'로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을 찾아갔는데, 비슷한 연배끼리 오후에 차 한잔 마시며 사적인 얘기를 나누는 자리처럼 됐다.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면 자부심을 가졌을 법한데요.

"그러려면 삶이 단정하고 모범적이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솔직히 떨쳐버리고 싶은 부담 같은 것이었지요. 어렸을 때 마음의 상처도 있었고…."

―마음의 상처라니?

"우리는 고향 예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 와 살았어요. 살림이 어려웠지요. 한번은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어요. 친구가 그 엄마에게 소개한답시고 '누구 손녀래'라고 속삭이자, '저런 애와 왜 노니' 하는 말이 들렸어요."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 우리 같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남에게 손을 내밀고 공짜만 바라는 걸로 비쳤을까요. 할아버지를 팔아먹고 사는 사람 같은…. 그때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어요. 누구의 손녀로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윤주경 독립기념관장은“자연인으로 살고 싶었지만 결국 내 조상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윤주경 독립기념관장은“자연인으로 살고 싶었지만 결국 내 조상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신현종 기자
―그러다가 '윤봉길 의사의 장손녀'로 살게 됐나요?

"10년이 채 안 됐어요. 제가 너무 소극적이니까, 주위에서 '할아버지 같은 분이 계셔서 대한민국이 있다. 그분의 손녀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라'고 말했어요. 저는 '자연인 윤주경'으로 살고 싶었지만, 결국 제 삶은 조상님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죠."

―집안에 남자가 없었나요?

"7남매인데, 막냇동생이 아들입니다. 저와는 열두 살 차이가 나죠."

―남동생은 뭣 하고?

"동생은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어요. 그전까지 국가유공자도 남성 위주였어요. 김대중 정부 때부터 외손(外孫)이나 딸과 손녀에 대해서도 인정해줬어요."

―대선 때 박근혜 후보를 지지해 독립기념관장이 됐다는 말도 있던데요.

"공모(公募) 절차를 거쳤어요. 주위에서 권유가 많았어요. 그나마 제가 잘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겨 응모했지요. 그전까지 독립기념관 이사로 활동했으니까요."

―박 대통령과 인연이 있지요?

"몇 년 전 어떤 분의 출판기념회에서 처음 만났어요. 20여명 정도 모인 자리였어요. 거기서 제가 '6·25 당시 유엔 참전국과의 인연은 우리 외교에서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하자, 당시 박 대표께서 '나도 외국에 가면 한국전 참전용사를 꼭 만난다. 그분들은 자신이 잊히는 걸 가장 걱정하더라'는 말을 했어요. 그때 이분에 대한 신뢰감이 생겼어요. 대통령이 될지 어떨지는 몰라도 '준비를 잘하고 있다'는 마음이 들었지요. 이런 제 생각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어요."

―그 뒤로 가끔 만났나요?

"그때 한 번뿐이었어요. 나중에 박 후보 대선 캠프에서 도와달라는 연락이 왔을 때 망설이지 않고 수락했어요."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박근혜 후보 캠프에 참여한 것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없었나요?

"제가 귀를 안 열고 살아서…. 이분(박근혜)이라면 우리가 힘들게 이뤄온 산업화와 민주화를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어요."

―당초 기대한 대로 대통령이 잘하고 있나요?

"대통령은 노력하고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 결과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 하늘의 몫인 것 같아요. 독립기념관장이 정치적으로 편향됐다고 할지 모르니 다른 얘기를 하죠."

―집안 얘기를 할까요. 할아버지(윤봉길)를 의식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할아버지 제사(祭祀)를 지냈으니까 '돌아가신 분'이라는 것은 알았어요. 어렸을 때였는데, 어떤 분이 '너희 할아버지가 누구신지 아니?' 하고 물었어요. 제가 '의사는 의사인데 병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윤봉길 의사인데요'라고 답했어요. 그분이 충격을 받은 듯 '네가 언행을 잘못하면 집안에 욕이 된다'고 정색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내가 연결되어 있구나'를 깨달았어요. 또 학비 면제를 받으려고 원호처(보훈처) 증명서를 떼야 할 때도 제가 또래 친구들과 다르다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죠."

―집안에서 '누구의 자손이니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훈육도 있었겠지요.

"혹시라도 남들에게 비난을 받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특히 아버지는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스러웠어요. 많은 고민을 안고 살았을 겁니다."

―아버지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요?

"할아버지로 인해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나쁜 아이'로 구박을 받았어요. 학교에서는 소위 '왕따'를 당한 거죠. 하지만 광복(光復)이 되자 갑자기 '훌륭한 집안 아들'로 바뀌었어요. 세상이 달라지니 갑자기 평가가 달라진 것이죠. 아버지는 이런 세상인심의 표변(豹變)에 겁을 냈어요."

첫 여성 독립기념관장… '윤봉길 의사의 장손녀' 윤주경씨(왼쪽).
―세상인심의 표변이라?

"광복 직후 김구 선생님도 집으로 찾아오셨고, 어떤 이들은 쌀자루도 두고 갔다고 해요. 하지만 뒷전에서는 할머니를 향해 '남편 뼈를 팔아서 먹고산다'는 수군거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6·25가 터진 뒤 세상이 다시 바뀌었어요. 이런 걸 겪다 보니 누구도 완전히 믿지 못했어요.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언제 안정이 됐나요?

"1980년대 들어와서야 아버지가 '이제는 괜찮을 것 같다'며 안도했어요. 아버지는 1984년에 57세로 돌아가셨어요."

―부친은 무슨 일을 하셨지요?

"농림부 양정국(糧政局)에서 근무했어요. 생활 면에서는 무력한 편이었죠.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우연히 어느 분이 '내가 청탁한 적 있는데 안 들어주고 참 바르셨다'고 말해줬어요. 그게 자랑스러웠어요. 집안 생계는 엄마가 모두 감당했어요."

―모친이 생활을 도맡았다고요?

"엄마는 김포공항에서 분식 가게를 했어요. 거기에 우리 식구가 매달려 살았던 셈이죠. 다행히 제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 국가유공자 자녀에게 학비를 면제해주는 제도가 생겼어요. 이 덕분에 우리 남매들이 다 대학에 진학하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친일파는 후대에도 영화(榮華)를 누리고, 독립운동가 집안은 대대로 가난하다고들 하지요.

"누가 할머니에게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고 하면, '다들 어렵게 살았을 때니 그렇게 살았다'고 답변했어요. 어떤 어려움도 내색을 안 했어요."

―지난 노무현 정부는 '친일파 재산을 환수해 독립운동가 후손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말했지요.

"그런 말을 듣는 것 자체가 치욕스러웠어요. 독립운동가의 헌신이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고 그 후손을 돕고 싶으면 국가 예산으로 당당하게 해줘야 하는 거지, 우리가 왜 그런 돈을 받아야 하나요."

―친일파 재산 환수에 대해 부정적인가요?

"자발적으로 내놓으면 몰라도. 현실적으로 재산 중에서 어떤 재산이 친일 행적으로 형성됐다는 걸 따질 수가 있을까요. 이들도 부당하다고 소송을 벌이는 그런 재산을 환수해 우리를 돕겠다는 말은 하지 말라는 거죠."

―최근 이인호 KBS 이사장의 경우도 그렇지만, 조상이 친일파였다는 걸로 특정 인물에 대한 공격이나 낙인을 찍는 풍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역사는 정확하게 기록해야 하죠. 그런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니까요. 하지만 조상의 행적으로 인해 후손이 사회를 위해 활동하고 기여하는 걸 막아서는 안 돼요. '주홍글씨'를 붙이는 풍토는 옳지 않다고 봅니다."

―조상이 명백하게 친일파인 후손에 대한 선입견은 없나요?

"그런 후손을 직접 만난 적이 없어요. 다만 누군가에게서 '우리 할아버지가 친일파였다. 당신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꼭 전하고 싶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한 번 받은 적은 있었어요."

―일제강점기는 36년 계속됐어요. 이에 저항한 독립운동가들이 예외적이고 특별한 인물이죠. 국민 대다수는 일본에 순응하고 협조했을 겁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일지 모르지요.

"당시 한반도에 남았으면 그런 삶을 살았을 겁니다. 할아버지(윤봉길)가 중국으로 떠난 이유도 거기에 있었어요. 그래서 친일 행적을 가르는 것에 대해 조심스럽습니다.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거죠."

―윤봉길 의사는 22세 때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장부는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글을 남기고 떠났지요. 부부가 함께 산 세월은 8년이었더군요.

"할머니가 집을 떠나는 할아버지에게 물을 떠 줬는데 안 드시고 갔다고 그날을 기억했어요. 수줍어서 '잘 다녀오시라'는 작별 인사를 못 했다고 했어요. 뒤늦게 부엌에서 신작로로 나가 보니 이미 안 보였다는 겁니다."

―윤봉길 의사는 국가적인 영웅이지만, 할머니에게는 남편이었으니 원망이 없었을까요?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 뒤 남은 집안일은 할머니의 몫이었어요. 정말 천사 같은 분이었지요.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속에 감추고 살았을 겁니다. 할아버지가 1932년 돌아가셨는데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6·25가 끝난 뒤 상이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해요. 그때 할머니는 신작로를 보면서 혹시 할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을까 기다렸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1988년에 돌아가셨어요."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연(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장에 폭탄을 던졌다.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해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당시 24세였다.
  • 최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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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임기자
  • 조선  입력 : 201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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