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람

[스크랩] `지구를 떠나거라` 개그맨 김병조, 명심보감 전도사로 인생 2막

바라쿠다 2015. 3. 7. 20:47


왕년의 배추머리, 스타 훈장님 됐다우~

80년대 그가 말하면 유행어   "먼저 인간이 되어라" 등… 힘든 시대 서민들에 큰 웃음
'뽀뽀뽀'로 어린이 만나고, 진행프로 시청률 70% 찍기도

훈장, 家業 잇는 겁니다   어릴 때 훈장 아버지로부터 무릎 꿇고 사서삼경 배워…
대학서 명심보감 16년 강의… 입소문 나 전국서 강의 요청

"말실수 한 번에 인기 추락… 아버지는 1년뒤 암으로 타계
어머니 한마디에 힘냈죠… '아가, 밥만 먹으면 된단다'"

잘나가던 배추가 시래기 됐다?   어르신들이 시래기라 불러도 서글픈 생각 들지 않아요
시래기가 몸에 더 좋고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으니…

학생들에게 주는 한마디   티코 타야 하는데 벤츠 타며 거들먹거리는 者 되지 말고
벤츠 타도 되는데 티코 타는 멋있는 사람이 되세요

며느리에 지어준 號는 '而爲堂'   而爲는 '그럼에도'라는 뜻… 자신을 낮추고 분수에 맞게
절제하는 삶을 살라는 의미… 시아버지 마음 전해졌으면…

1980년대 '배추머리'란 별명으로 유명했던 개그맨 김병조(金炳朝·64)씨의 한마디는 곧바로 유행어가 되었다. 분수를 모르고 나쁜 짓을 하려는 이들에게 무당이 말하는 톤으로 "지구를 떠나거라"고 쏘아붙여 서민의 속을 시원하게 했다. "먼저 인간이 되어라" "나가 놀아라" "난 이렇게 산다우" 등도 그가 유행시켰다.

그가 진행을 맡은 '일요일 밤의 대행진'은 시청률이 최고 70%까지 치솟기도 했다. 30~40대는 그를 '뽀뽀뽀'의 뽀병이로도 기억한다. 어른들도 보던 어린이 프로 '뽀뽀뽀' 주제가는 체육 행사 응원가로도 불렸다.
 [Why] [최홍렬 기자의 진심]
1980년대 최고의 인기 개그맨이었던 김병조씨가 ‘명심보감’을 강의하는 ‘훈장님’으로 변신했다. 재미있는 입담과 유머로 수강생들을 울리고 웃기는 강의로 소문이 났다. 그는 “어렸을 적 서당 훈장인 아버지께 처음 배운 ‘명심보감’은 괴롭고 슬플 때마다 펼쳐보며 자신을 되돌아본 내 인생의 가이드북”이라고 했다. / 이태경 기자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그는 1990년대 중반 개그계를 떠났다. 개그맨 대신 교육자로 제2의 인생을 개척했다. 서당 훈장의 큰아들답게 '훈장님'으로 변신한 것. 무엇을 가르치나 봤더니 예능이 아니었다. 마음을 수양하는 고전 '명심보감(明心寶鑑)'이었다.

그는 광주광역시 조선대에서 초빙교수로 16년째 일반인과 대학생에게 '명심보감'을 강의하고 있다. 하지만 개그맨의 피는 어디 가지 않았다. 특유의 유머와 입담에 힘입어 그의 강의는 광주의 명물이 됐다. 소문이 나자 전국의 각급 학교와 기업체, 관공서에서도 초청이 이어지고 있다. 왕년의 인기 개그맨이 스타 강사가 된 것이다.

◇개그맨에서 훈장님으로 변신

김병조씨는 최근 '명심보감' 원문을 번역하고 해석을 붙인 '김병조의 마음공부'(전 2권·청어람)를 펴냈다. 오랫동안 강의만 하다가 자신이 번역·해석한 '명심보감'을 선보인 것이다. 그가 번역한 '청주판 명심보감'은 중국 명나라 때 학자 범립본(�立本)이 유(儒)·불(佛)·선(仙) 경전 등 중국 고전에 나오는 좋은 구절들을 뽑아 모은 책으로, 이우성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1974년 경북의 한 고가(古家)에서 발견해 세상에 알려졌다. 고려시대 추적(秋適)이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기존 판본보다 3배 정도 많은 방대한 분량이다. 그는 "'명심보감'을 강의하면서 발견한 원본 인용 및 해석상 오류를 바로잡고,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풀어썼다"고 했다.

 [Why] [최홍렬 기자의 진심]
김병조씨가 1980년대 MBC ‘일요일 밤의 대행진’에서 불조심을 하지 않는 세태를 풍자하고 있다. / 김병조 제공
지난 4일 서울 노원구 월계동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소파 옆에는 부모의 은혜를 보답하도록 가르친 불교 경전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이 적힌 병풍이 놓여 있었는데, 그가 직접 글씨를 썼다고 했다. 수백 권의 고서(古書)와 족보로 가득한 그의 서재 한쪽에는 취미로 모은 연적 200여 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금강소나무 탁자 위엔 보리순차 향이 그윽했다.

―개그맨이 '명심보감'을 가르친다니, 처음에 어색하게 들렸다.

"방송 일로 광주에 자주 갔는데, 1998년 조선대 사회교육원에서 연극과 영화, 코미디 등에 대해 강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런데 연극이나 코미디보다는 어릴 적 서당 훈장을 하신 아버지께 배운 이후 평생 곁에 두고 읽은 '명심보감'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대학에서도 '명심보감'을 강의하고 싶다는 내 뜻을 받아들여 줬다."

―고전을 강의한다고 했을 때 주위의 반응은.

"내가 대학에서 '명심보감'을 강의한다고 하니 광주 지역 일부 한학자가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첫해 반응이 좋아 이듬해 학부 교양과목으로 확대됐다. 한 학기 수강 인원이 600명을 넘은 적도 있다. 나는 전통적인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린 시절 '천자문' '소학' '명심보감' '사서삼경' 등을 배웠고, 어른이 되어서도 한학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전통 서당 식으로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날그날 배운 것을 외웠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나도 언젠가 훈장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회가 온 거다."

―다른 고전도 많은데 '명심보감'을 택한 이유는.

"아버지는 특히 '명심보감'을 중요하게 여기셨는데, 내가 아버지께 배운 '명심보감'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을 아버지도 바라셨을 것이다. 이 일은 우리 집안의 가업(家業)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방송 라디오에서는 '김 교수의 명심보감' 코너를 1990년부터 20여년 동안 진행했다."


―'명심보감'이 특별한 의미가 있나 보다.

"'명심보감'은 내 인생의 가이드다. 책의 아무 데나 펼쳐도 교훈과 위안을 준다. 한마디로 마음의 거울이다. 옛 성현의 말씀을 거울삼아 자신의 마음이 옳은 마음인지 그른 마음인지, 선한 마음인지 악한 마음인지 가려 화장을 고치듯 마음을 고치라는 가르침이다. 개그맨이라고 무시할까 봐 더 열심히 공부하고 수업 준비를 했다."

 [Why] [최홍렬 기자의 진심]
김병조씨가 서울 월계동 자택에서 '명심보감'에 대해 이야기하며 활짝 웃고 있다. 병풍에 쓰인 것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가르치는 '부모은중경'으로, 김씨가 직접 글씨를 썼다. / 이태경 기자
―개그맨 경험이 강의에 도움이 되었나.

"무게 잡지 않고 재미있게 풀어 부담 없이 들을 수 있게 한다. 내 강의는 여러 번 듣는 사람이 많다. 매번 느낌이 다르다고 한다. 동양 고전 강의지만 수강생들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그는 "나의 '명심보감' 강의는 '당의정(糖衣錠)'"이라고 했다. "유익하지만 쓴 약(명심보감) 표면에 설탕을 발라 먹기 좋게 한 것이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면 항상 부족을 느끼는 반면, 못한 사람과 비교하면 항상 풍족하다는 구절이 있다. 이를 설명할 때 '걸을 때 위를 보고 걸으면 전봇대에 부딪히지만 아래를 보고 걸으면 동전이라도 줍는다'는 식으로 농담하듯 풀어나간다. 왜? 나는 개그맨이니까!"

―수강생들이 어색해하지 않나.

"나이 드신 분들은 '배추가 시래기가 다 됐다'고 농담을 한다. 칠순이 넘은 어르신들이 '매일 목욕하듯 공부한다. 마음도 목욕해야 하니까'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 '가족 생각 많이 했다' 등의 반응을 보인다. 어떤 중년 아저씨는 '돈 전(錢)' 자밖에 몰랐는데, 이제부터 '사람 인(人)' 자를 배우러 왔다고 했다. 전통 서당 식으로 내가 그날 배운 구절을 선창하면 수강생들이 여러 번 복창해 자연스럽게 입에 익도록 한다."

―배추가 시래기가 됐다니 서글프지 않나.

"시래기가 더 좋다. 변하지 않아 오래 두고 먹을 수 있고, 몸에도 좋은 건강식이다. '명심보감'이 그렇다. 이제 배추머리 대신 시래기라 불러달라."

머리는 희끗희끗해졌지만 그의 유머 감각은 녹슬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무너져내린 인기

1980년대 개그맨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 김병조씨는 한순간의 말실수로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1987년 6월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서 '민정당은 정(情)을 주는 당, 통일민주당(당시 야당)은 고통을 주는 당'이라고 한 말이 큰 파문을 일으키면서 비난 여론이 일었다.

―엉겁결에 정치적 구설에 올랐다.

"민정당 측에서 사전에 준 대본을 읽었을 뿐이라고 방송에서 사과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엄청난 '죄인'이 되어 있었다. 7년 인기가 하루아침에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인기만큼 허망한 것도 없었다. 집으로 수많은 항의전화가 걸려와 아이들을 친척집으로 보냈다. 1981년부터 진행을 맡았던 MBC '일요일 밤의 대행진' 시청률은 곤두박질쳤고, 이듬해 그 프로를 떠났다. 아버지도 쇼크를 받으셨는지 1년 후 뇌암으로 돌아가셨다. 그 일 때문이 아닌가 해서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그는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렸다)."

―인기 정상에서 밑바닥에서 떨어졌으니 상심이 컸겠다.

"어머니의 '아가, 밥만 먹으면 된단다'란 말에 힘을 얻었다. '인기 같은 거 다 소용없으니 유감없이 버려라, 절망에 빠지지 말고 견디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1990년 SBS로 옮긴 후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했지만 예전의 인기는 되찾을 수 없었다. 1993년 KBC광주방송의 '열창무대' 사회를 맡아 광주를 자주 방문한 것을 계기로 조선대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방송에서 '명심보감 전도사'로 인생의 무게 중심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일만 없었으면 계속 개그맨으로 활동했을 텐데.

"오히려 그 일 덕분에 고향에 내려가 강의도 하고 한학도 하게 됐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도 다시 보게 되었다. 전당대회 기사를 쓴 기자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 기자 덕분에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도오악자 시오사(道吾惡者 是吾師·나의 단점을 말해주는 사람이 나의 스승이다)'라는 말을 절감했다."

그는 10여년 전 오른쪽 눈을 실명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혈압이 높아져 망막혈관이 터졌다. 그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보왕삼매론'에 나오는 구절을 떠올린다고 했다. '처세불구무난 세무난즉교사필기(處世不求無難 世無難則驕奢必起)', 즉 세상을 살며 어려운 일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어려운 일이 없으면 교만하고 사치한 마음이 생긴다는 뜻이다.

◇명심보감 핵심은 '어머니처럼 살아라'

김병조씨는 한학자 집안에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병조·병오·병석·병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침(朝), 점심(午), 저녁(夕)에 빛나고(炳), 1년(年) 내내 빛나라는 뜻이다.

―집안 분위기가 색달랐겠다.

"7대 장손으로 할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학에 조예가 깊으신 할아버지는 조상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붓글씨도 배웠다. 어렸을 적 한학에 입문한 게 어른이 되어 독학으로 한문 책을 볼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집에는 고서와 족보들이 쌓여 있었다. 족보를 통해 역사의식을 배웠다."

―족보는 그냥 기록일 뿐 아닌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한 사람도 족보에는 간략한 행적 한두 줄로 정리되어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그 안에 들어 있다. '용비어천가'의 구절처럼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뿌리는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조상이다."

집안은 가난했다. 아버지를 따라 훈장이 되었지만, 평생 힘이 되어 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는 "책만 읽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돈을 벌었다"며 "양반 체면상 고향에서 장사할 수 없어 내가 중학생 때 어머니는 친척이 사는 군산으로 이사해 행상을 하셨다. 어머니가 머리에 인 양푼에는 젓갈·고구마·나물·실 등이 담겨 있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겠다.

 [Why] [최홍렬 기자의 진심]
"어머니는 이리(지금의 익산) 인근에서 산 고구마를 군산에 가져가서 팔았는데, 당시 완행열차 삯도 너무 큰 부담이었다. 무임승차를 할 때마다 어머니는 차장의 눈을 피해 그 무거운 양푼을 머리에 인 채 도망 다니시곤 했다. 어느 날 뒤에서 쫓아오던 차장이 양푼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목을 다치셨는데, 비만 오면 목이 아프신지 얼굴 표정이 어두웠다. 그런 어머니를 뵐 때마다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울음을 참았다."

그는 "어머니는 가난에 치인 나에게 '아무리 굶어도 너는 가르친다. 기죽지 말라'며 용기를 주셨다. 내가 자신 있게 살아왔다면 어머니의 이런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내 강의의 결론은 항상 어머니"라고 했다.

―'명심보감' 강의에 왜 어머니가 나오나.

"자식들을 위해 물을 떠놓고 비시고, 더 못 주어서 한이고, 더 못 먹여서 한이고, 더 못 입혀서 한이시다. 이런 어머니의 마음이 '명심보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선(善)'을 행하라는 가르침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말솜씨가 좋아 초등학교 시절부터 교내 행사에서 사회를 도맡았다. 광주고에 진학하면서 육군사관학교반에 들어갔다. 집안이 가난해 학비가 면제되던 육사에 진학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학생들을 워낙 잘 웃겨 교사들은 연극영화 쪽을 추천했고, 중앙대 연극영화과로 방향을 틀었다.

―학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겠다.

"중앙대에서 한 번도 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다. 지금도 장학금을 받지 못해 학업을 포기하고 집으로 내려가는 장면이 꿈에 나온다. 찰리 채플린의 자서전이 너무 좋아 몇 번이고 읽으며 개그맨의 꿈을 키웠다. 대학 시절 친구들이 곱슬머리를 보고 '배추머리'라고 부른 것이 평생의 별명이 되었다."

군대 시절에는 백마부대에서 병사 위문공연을 다니는 문화선전대에서 활동했다. 요즘으로 치면 연예병사다. 제대를 앞두고 정훈장교가 공적을 인정해 백마부대와 자매결연을 한 TBC에 추천해줘 1975년 코미디 프로 '살짜기 웃어예'에 개그맨으로 데뷔했다.

―개그맨은 한학을 접할 일이 없지 않나.

"방송 활동을 하면서 한학 공부를 꾸준히 했다. 덕분에 '김병조의 생활한자'를 진행했고, '청춘만세'에서 훈장님 역을 맡았다. 코미디에서 '명심보감'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한문 구절을 많이 알아 '면장' '훈장님'이란 별명을 얻었다."

―'명심보감'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면.

"'안분신무욕(安分身無辱) 지기심자한(知機心自閑)'이란 구절이다. 분수를 알고 지키면 일신에 욕됨이 없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면 마음이 절로 한가해진다는 뜻이다. 분수가 무엇인가. 4를 가지고 3을 쓰는 4분의 3은 진분수요, 4를 가지고 5를 쓰는 4분의 5는 가분수라고 설명한다.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가분수는 '가짜'라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학생들에게 티코 타야 하는데 벤츠 타고 다니며 거들먹거리는 사람이 되지 말고, 벤츠를 타도 되는데 티코 타고 다니는 멋있는 사람이 되라고 얘기한다."

그는 "연기자 중 임현식씨와 전원주씨를 좋아한다"고 했다. "이들은 왕과 왕비를 시켜준다고 해도 하지 않는다. 평생 조연으로 살았다. 주어진 역할이 작더라도 묵묵히 해내 드라마에 재미를 준다. 이들은 강의에 분수를 아는 삶으로 등장한다."

김병조씨는 이경규씨와 함께 개그맨 주례계의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김준호 염경환 황기순 이재포 등의 주례 선생님이다. 그는 "신랑 신부가 맞절하듯이 서로 양보하고 자신을 낮출 때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많이 한다"고 했다.

◇학자와 개그맨,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

―중간고사 대신 아버지에게 양말 한 켤레 사 드리는 것을 숙제로 낸다는데.

"살아생전 아버님께 존경한다고 말씀 못 드린 게 그렇게 후회가 될 수 없어서다. 아버지가 안 계신 어느 여학생이 어머니에게 대신 양말을 사 드렸더니 어머니가 그 양말을 붙잡고 대성통곡을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는 '응봉(鷹峰)'이란 호를 가지고 있다. 고향(전남 장성)에 있는 선산 이름이다.

―호를 선산 이름으로 지었다.

"고향 터를 잡으신 고조할아버지와 효행으로 이름이 높은 증조할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곳이다. 조상의 얼을 이어받겠다는 뜻으로 스스로 만들었다. 이후 편지를 쓸 때나 사인을 해줄 때, 심지어 금융실명제 전에는 저금통장에도 이름 대신 썼다."

그의 안방에 증조할아버지의 효행기(孝行記)를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본다. 옛 족보를 뒤적이다 낡은 봉투를 발견했는데, 그 안에서 발견한 효행기를 새로 써서 액자에 담았다. 김병조씨는 아내에게 '위이당(爲而堂)', 내년 초 아들과 결혼하는 예비 며느리에게는 '이위당(而爲堂)'이란 당호를 지어주었다.

―당호가 특이하다.

"'위이'는 '할 뿐'이란 뜻으로, 보답을 바라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치도 보지 않고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이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뜻으로 자신을 낮추고 분수에 맞게 절제하는 삶을 뜻한다. 며느리가 나중에 손자에게 할아버지의 이 마음을 전달했으면 좋겠다."

그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점잖은 학자의 모습이고, 나머지 하나는 개그맨이다. '명심보감'을 얘기하다 보면 두 얼굴은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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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뉴스부 차장
    E-mail : hrchoi@chosun.com
    1991년 입사해 사회 부문과 문화 부문에서 대충 10여년씩 근..
                    조선    입력 : 2014.11.15


출처 : 해암의 일상
글쓴이 : 해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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