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통을 바라보는 8개의 시선
법이냐 윤리냐 본능이냐 … 어떤 잣대 필요할까 ?
일생을 많은 여인들에게 둘러싸였던 피카소. 그에게 사랑은 삶의 원동력이었다(아비뇽의 아가씨들, 피카소, 1907년).
‘간통의 천국’에서 허울뿐인 간통죄
최근 간통죄 합헌 결정이 내려진 이후 옳네 그르네 말들이 많다. 일부일처제라는 결혼제도가 인간이 가정을 이루고 지켜나가는 데는 최고의 제도지만, 한 사람만 평생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한 인간 본능에 위배되는 제도이니 어쩌란 말인가.
간통죄 존폐 논란 자체가 그만큼 답이 없는 명분이라는 뜻이다. 다만 한 가지, 간통죄가 존치하는 몇 안 되는 나라 가운데 한국이 속한다는 사실엔 약간 서운하다. 좀 없어 보이고, 촌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학교 선생님들이 문제집 숙제를 일괄적으로 내주곤 하셨는데, 당시 나는 쓰기보다 자꾸 되뇌고 생각하며 입으로 중얼거려야 머릿속에 쏙 박히는 아이였다. 그래서 그런 숙제들은 여러모로 내 공부를 방해하는 구실밖에 하지 못했다.
아마 그 엄청난 분량의 문제집 숙제만 아니었어도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는 서울대에 들어갔을 것이다. 학교나 국가나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왜 그렇게 뭔가를 만들어 번거롭게 할까? 나는 간통죄가 꼭 문제집 숙제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국민의 결혼생활을 도와주려고 만들었다지만 도움은커녕 쓸모도 의미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어쩔 수 없는 ‘간통의 천국’이다. 밤거리에 나가봐라. 그 많은 룸살롱과 안마시술소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겠나? 그 많은 업소들에서 밤마다 수천수만 건의 간통이 이뤄진다. 법대로 한다면 매일 수천명씩 감옥에 들어가느라 나라 경제는 물론 정치와 사회까지 마비돼야 마땅하다. 국가가 간통을 법으로 단속할 생각이라면 왜 그런 장소들을 그냥 놔두는지 이상할 따름이다.
우리나라에는 간통죄를 만들어놓고도 간통을 묵인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통용되고 있다. 내가 아는 기혼 중년남성 가운데 단 한 번도 간통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남성들 스스로 그런 고백을 술자리에서 자랑 삼아 한다.
그럼에도 탤런트 옥소리 씨가 간통죄로 고소당하자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불결한 여자’ ‘마녀’로 낙인찍으며 손가락질했다. 왜 남성들의 밤문화와 외도는 ‘당연한 남성다움’으로 인정받고 묵과되면서 여성의 외도는 집중 사격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지만 이 점을 걸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간통에 대한 국가의 태도가 지나치게 우유부단하고 명분론적인 것도 불만이다. 단속하려면 강력히 하든지, 아예 없애 국민 성생활을 ‘쿨하게’ 놔주든지. 지금의 간통죄로는 배우자의 외도를 억압하기 어렵다. 일단 이혼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 그렇고, 또 증거만 있다고 해서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도 그렇다.
그래서 어리바리한 여성은 더 당한다. 진짜 ‘선수’들은 현장을 잡혀도 “안 했어. 그냥 대화만 했어”라며 100% 부인하기 때문이다. 간통죄가 공권력을 동원해 나를 배신한 상대에게 복수하는 괘씸죄라면,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방법으로는 오히려 화병만 도지기 십상이다. 차라리 청부업자를 고용해 두 ‘연놈’을 다리몽둥이가 분질러질 때까지 패주는 게 속 시원한 복수극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내나 남편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해 그와 자고 싶다면 간통까지 갈 필요도 없다. 깨끗이 이혼하고 그를 사랑하면 된다. 배우자를 속인 채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잠자리까지 하면서 지켜야 할 결혼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성욕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제도권 안에선 일이 된다
간통이란 주제를 다루기엔 지면이 너무 좁다. 그래서 오해의 소지가 있음에도 생략해가며 글을 쓸 수밖에 없어 아쉽다. 종을 번식해 죽고 사는 생물들이 사람처럼 솟구치는 성에너지의 욕망으로 생식에 이르는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사람은 그렇게 생식한다. 이 자연적인 현상을 사회는 결혼으로 제도화했다. 결혼제도는 성에너지와 종의 번식을 제도적 이성인 배우자와의 관계로 한정했다. 이 제도는 결혼 당사자를 ‘하늘이 정했다’거나 ‘일부종사’ ‘조강지처’ 등의 윤리적 혹은 신앙적 강제를 통해 정서적 억압에 이르게 하는 역사를 지녔다.
그런데 사회는 남성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남성은 성욕의 제도화가 가진 부자연스러움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축첩이라든지 기생계급이라든지 하는 여러 장치로 부자연스러운 정서적, 제도적 억압을 극복하며 살아왔다.
<== 사랑을 찾아 떠나는 ‘외출’에 우리는 ‘간통’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긴다. 2005년 영화 ‘외출’의 한 장면.
허난설헌 같은 여성의 불행이 하나의 상징인데, 또 다른 상징으로는 황진이를 들 수 있다. 허난설헌은 자신이 여성으로 태어난 것에 탄식했고 황진이는 남성들의 외간생활을 위해 존재하는 자신의 삶의 방식에 스스로 단죄를 내려 시신을 벌레의 밥이 되게 하라고 유언했다.
결국 우리가 아직도 고민하고 조롱하고 은근히 즐기며 질시까지 하는 ‘불륜’의 역사는 이런 변천을 보여왔다. 불륜은 매매춘과도 분리된다. 성욕을 해소하는 방식에 돈이 오갔다면 불륜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불륜은 정신적인 것이어야 한다.
사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 ‘사랑’보다 더 아름답고 싱그러운 것이 어디 있으랴. 그런데 현재의 결혼제도에선 그것의 효력이 오래가지 않는 모양이다. 상업방송의 사활이 걸린 드라마가 불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텔 수가 늘어나는 것을 보면 불륜은 산업으로서의 발전 가능성도 창창한 듯하다.
불륜이 사회건전성을 유지하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발생 원인에 대해 솔직하고 용감하게 접근해야 한다. 이혼이 느는 추세도 사실은 제도로서의 결혼이 보여주는 출구 혹은 변형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여성의 성욕이 식민지 같은 지배를 받을 때 이혼과 불륜은 낯선 경우였다. 그런데 이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는 것에 비례해 여성의 성욕도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자기 욕망의 실현에 주저하지 않게 됐다.
사람의 성욕은 자연스러운 자연 그 자체다. 제도권 안에 그 욕망을 집어넣었을 때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듯 성욕은 ‘일’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일이 아닌 것, 일에서 벗어나는 것을 욕망한다. 불륜은 휴가가 필요하고 여행이 필요한 기혼자들의 성적 욕망, 자연스러운 자연 그 자체인 성욕의 실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간통죄 존재했을까
간통이 범죄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가정이라는 조직을 우선시하느냐, 개개인의 인격을 우선시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가정이 위협받게 되면 사회도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간통을 범죄행위로 보겠지만, 개개인의 처지에서는 자신의 의지로 신체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범죄로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현대와 맞물려 있는 조선시대는 통치이념인 유교의 삼강오상(三綱五常)이라는 윤리로 남녀의 자유로운 애정표현이나 성적 행위가 엄격히 제한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는 정치를 담당하는 도학자들이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 강조한 것이고, 실제로는 그에 대한 잣대가 상당히 느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국가 공식기록인 ‘왕조실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행해지는 부적절한 성적 행위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나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간통 관련 사건은 수백 건이 넘지만, 크게 문제됐던 것은 사회를 지탱하는 버팀목인 강상(綱常)을 위반한 경우에만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상중(喪中)에 기생과 간통한다든지, 백성에게 본보기가 돼야 할 자리에 있는 자가 부적절한 성적 행위를 한다든지, 성적 욕망으로 살인을 저지른다든지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국가와 개인에게 현저한 위해를 가한다고 판단해 강상죄를 적용, 큰 죄로 다뤘다.
반면 그렇지 않은 남녀 사이의 성적 행위는 문제 삼지 않았다. 이는 조선시대가 인간이 지닌 성적 욕망이 남녀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같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한 사회였다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조선시대에는 간통행위 자체를 문제 삼아 처벌했던 것이 아니라 강상의 윤리를 현저히 해쳤는지를 잣대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간통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모든 면에서 조선시대보다 개방적이고 자유롭다는 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지만, 간통죄에 대해서는 현대의 법률이 조선시대의 그것보다 엄격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남녀의 부적절한 성적 행위가 타인의 생활이나 국가 이익을 해치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의지로 욕망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사용하는 것을 범죄행위로 처벌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일부일처제는 행복한 구속? 본능 가두는 규제?
<==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
시시각각 변하는 것투성이인 우리 삶에서 일생을 함께하겠다는 한 남성과 한 여성의 사랑 맹세만큼 든든한 게 있을까? 그러나 역설적으로, 변치 않는 사랑이 흔치 않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변치 않는 사실이다.
동물의 본능에 비춰볼 때 일부일처제는 결코 자연스러운 제도가 아니다. 실제로 지구상의 4000종 넘는 포유류 가운데 일대일의 짝을 갖는 종은 10여 종에 불과하다. 인간도 853개 문화권 가운데 16%만이 일부일처제를 택하고 있다. 일부일처제 사회에서도 외도는 빈번히 일어난다. 그런 점에서 일부일처제는 본능을 가두는 굴레이자 허울뿐인 결혼생활에 대한 속박일 수 있다.
하지만 결혼이란 인간에게 안정감과 행복감을 주는 제도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심리학자 에드 디너(Ed Diener)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결혼은 행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독일 성인 1700명을 대상으로 15년간 살펴본 결과 사람들은 결혼을 전후해 이전보다 더 큰 행복을 느꼈다. 또한 기혼자는 독신자보다 대체로 더 건강하고 장수하며 더 많은 행복감을 느낀다.
철학자 플라톤이 말한 대로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닌, 어딘가에 진정한 영혼의 짝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사랑을 찾아다니는 생물학적 본능은 그 완벽한 짝을 만나기 위한 여정일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토록 강렬한 본능에 일방적으로 끌려가기보다 결혼생활 동안 함께 갈고닦는 경험을 쌓는 것, 그래서 비로소 서로에게 맞는 짝이 돼가는 것도 인간 승리 아닐까? 어쩌면 본능에 취약한 인간의 약한 의지를 법으로 묶어두고서라도 신뢰를 유지토록 하기 위해 간통죄라는 제도가 지속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간통은 쌍방과실로 생긴 과오
나는 의관을 정제한 유림 인사는 아니지만 보수적 사고로 일관한 삶을 살아왔기에 간통에 대해 따뜻한 시선은 없다. 물론 결혼이란 큰 틀이 깨질 수도 있다는 사실, 쉽지는 않지만 받아들인다. 어쨌든 결혼도 일종의 약속인 만큼 굳건한 철옹성은 아니니까.
하지만 허황된 성적 상상까지도 끌어내는 간통, 즉 상대에 대한 육체적 배반은 부부관계를 처참한 종막에 다다르게 한다. 내 곁을 떠나는 순서를 밟은 뒤 조금 시간을 두고 통(通)하면 안 되는 것일까. 성급한 그들의 행보가 상처를 남기고 심지어 무력사태의 근원이 되기도 하니, 간통을 흔들림 없이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떠나간 마음에 법적 보복조치를 취하는 건 더더욱 매력적인 처사가 아닌 듯싶다.
이미 내 곁을 떠나 저 멀리에 머물러 있는 상대에게 결혼이란 약속의 대가를 법의 힘으로 치르게 하는 게 과연 최선의 선택일까.
간통을 범한 배우자를 탓하고 처벌을 바라는 건 인지상정이겠지만,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잠시 긴 호흡 내쉬며 뒤를 돌아볼 필요는 있겠다. 아, 물론 복수심에 불타 뒤가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조금만 더 주의를 집중하면 간통은 쌍방의 이해관계가 상충됐기에 벌어진 참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백년지대사를 맹세한 상대를 배신할 땐 엄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간통 기회가 찾아왔을 때 거부할 수 있는 담대한 용기는 배우자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그 근원은 아닐까. 현재 내 처지를 잠시 대입해본다면 결혼 이후 간통을 범할 용기도, 그럴 만한 이유도 없었다. 아직 나와 배우자 사이엔 특별한 문제가 없고, 결혼의 맹세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결국 배반당한 상대에겐 속 아린 말이겠지만, 확언컨대 간통은 ‘쌍방과실로 생긴 과오가 맞다’는 견해다. 당연히 해결의 매치포인트는 당사자에게 있다. 상대를 미워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생불(生佛)의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지만 걱정되는 것은, 내 주장이 ‘쿨’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관점만 바꾼 또 다른 모습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하는 점이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게 간통 아니던가. 이렇게 일갈하는 내가 간통 사건을 직접 체험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까. 솔직히 자신 없다. 그래도 법적 대응이나 극단적 보복 조치와는 조금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헤스터가 살던 ‘주홍글씨’ 시대가 아닌, 이혼 남녀도 멋진 삶을 누릴 수 있는 2008년이 아닌가.
남녀의 바람기는 유전자 탓?
암수 간 정절을 지키는 것으로 유명한 새가 있다. 하지만 그 새끼들을 조사해보니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심하게 바람을 피웠다. 동물들이 자기 짝에게 한결같이 충실하다는 생각은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본래 일부일처형이 아니라는 증거는 꽤 많다. 그럼에도 인류는 일부일처제를 택했다. 그것이 남녀평등만을 위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일부일처제는 남성의 번식 기회를 평등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불리한 점도 있다. 짝이 한 명으로 한정됨으로써 좋은 유전자를 선택할 기회가 그만큼 줄어든다.
일부일처제가 타고난 성향이 아니라면, 남녀가 바람기를 지니는 것은 자연스러운 성향이라 볼 수 있다. 바람기는 진화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건강하고 매력적인 상대의 유전자를 얻어 자손에게 물려준다면 그만큼 그 자손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해진다.
그리고 이는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된다. 유전자는 널리 퍼지고 번성하는 것이 지상 목표다. 매력적인 상대에게 눈독을 들이는 바람기는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사랑, 섹스, 쾌락을 번식과 분리시킨 피임법이 발명되면서 상황이 좀 복잡해지긴 했지만.
어쨌든 한 명의 짝과 평생 해로하라는 제도는 널리 번성하라는 유전자의 명령을 방해하는 셈이다. 사회제도와 생물학적 명령 사이의 이런 갈등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다. 불륜, 질투, 거짓말, 폭력, 자살….
하지만 바람기에서 비롯되는 온갖 사건 사고는 이런 갈등의 해소나 예방 수단이 아직 미비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인류의 본성을 충분히 억제하거나 바꾸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사회제도라는 문화적 산물이 유전자보다 더 우세해질 수 있을까. 나아가 인간 본성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문화적 진화의 단위인 밈 개념이 해답을 줄 수 있을 법도 하다. 일부일처제가 지배적인 밈 복합체로 자리잡는 데는 성공했으니 그 이상도 가능하지 않을까.
바람기도 진화의 산물인 만큼 그것을 발현하는 유전자가 있을 수 있다. 최근 스웨덴 연구진은 바소프레신 호르몬과 관련된 유전자가 바람기에 영향을 끼친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충직한 남편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바람둥이 남편에게 바소프레신을 주사하도록.
물론 바람기를 반드시 잡아야 하는가는 별개로 고민할 문제다.
사랑, 결혼 그리고 섹스 사이
우리는 오롯이 사랑만 논할 수는 없다. 인류의 사랑은 언제나 결혼이라는 ‘제도’와 섹스라는 ‘행위’ 사이에 놓여 있었다. 사회인류학자에게 결혼은 가족을 이루고 친족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기본이 되는 인간 유대의 형태다. 진화생물학자에게 섹스는 이른바 ‘이기적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개체의 생존 본능이다. 이렇게 인류의 사랑에 대한 해석은 집단 유지와 개인 욕구 사이에 놓여 있다.
하지만 결혼과 섹스 사이에서 사랑의 의미는 문화적으로 다양하게 구성된다. 예를 들어, 인류 역사에서 사랑을 결혼이나 섹스와 떼어놓는 규범을 가진 집단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가문의 이해관계를 위한 중매결혼이나 중세 유럽의 기사도 연애가 대표적이다.
집단 유대를 위해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결혼의 희생자로 만드는 사회도 적지 않다. 일부다처제나 처첩제 사회, 여성에게만 정조를 요구하는 가부장적 사회의 결혼 규범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나혜석의 ‘불륜’에 가해진 비난과 멸시가 남편 김우영이나 옛 애인 최린을 비켜간 것은 부계 한국 사회의 결혼 유대가 여성의 정조를 담보로 유지됐음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서 사랑이 공공연하게 결혼의 이데올로기로 내세워진 것은 나혜석이 희생된 이후의 일이다.
현대의 결혼은 최소한 법적으로는 남녀가 동등한 개인 간 계약이고, 결혼 계약의 전제는 ‘당신만을’이 강조되는 배타적 사랑이다. ‘내가 당신만을’ 그리고 ‘당신이 나만을’ 사랑하는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알 수 있다고 믿을 뿐 분명하게는 알 수 없다. 결혼은 유대이므로 서로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다.
섹스가 사랑의 바로미터가 되는 이유는 아마도 일차적이고 본능적인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을 가장하기’ 위해 섹스를 하기도 한다. 아마도 섹스가 주는 쾌감으로 인해 일단 섹스와 사랑이 서로 꼬리를 물고 돌아가기 시작하면 양자를 떼어내 구분하는 것은 정교한 해체술을 요하는 동시에 논쟁거리가 된다.
하나의 예로 영화 ‘색, 계’에서 량차오웨이와 탕웨이의 섹스는 어떤가. 서로를 이용하는 것인지 사랑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정사 장면을 마음 편히 즐길 수 없다. 나에게 이 둘의 섹스는 서로를 위로하는 행위로 읽혔다. 둘은 비록 편은 다르지만 대결의 시대에 조직에 대한 충성의 압박으로 질식해가는 개인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시대에 결혼과 사랑, 섹스와 사랑의 관계는 당위적이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제도와 섹스라는 행위는 그 자체로 당위적 관계를 갖지 못한다. 단편적 당위의 조각들은 주사위 퍼즐처럼 가로세로로 엮여야만 하나의 그림으로서 도덕적 힘을 가진다. 결혼과 섹스는 사랑을 사이에 두고 엮여야만 많은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 그러니 언제나 그 찬란하고 몹쓸 사랑이 문제인 것이다.
‘간통’ 가지고 윤리·도덕 따지는 것은 시대착오
<== 마광수 연세대 교수·국문학
‘간통’이란 말은 어쩐지 섬뜩하고 무시무시하게 들린다. 차라리 ‘혼외정사’라고 하는 게 낫다. 사실 ‘스와핑’까지 이뤄지고 있는 시점에서 ‘간통’으로 윤리와 도덕을 따진다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나는 원칙적으로 결혼제도 자체를 반대하는데, 만일 결혼한다 해도(물론 ‘계약동거’ 형식으로 하겠지만) 아내에게 혼외정사를 부추길 것이다. 물론 나도 혼외정사를 하고 말이다. 혼외정사는 부부간 ‘권태감’을 막아주는 기막힌 처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에 나온 그 유명한 에로티시즘 영화 ‘엠마뉴엘 부인’에서도 부부 합의하에 각자 혼외정사를 한다. 그것도 양성애적 형태로 말이다. 그런데 21세기를 맞은 이 시점에 ‘간통’ ‘불륜’ ‘반(反)도덕’ 따위를 운위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나는 1985년 말 결혼해 90년 초 이혼했다. 이혼 사유는 ‘권태’였다. 거기에 견딜 수 없는 ‘구속감’이 덧붙었다. 결혼 기간에 나는 ‘혼외정사’를 갖지 않았다. 나를 꼬드기는 젊은 여성이 많았음에도 말이다. 그 이유는 어쨌든 결혼할 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나는 말하자면 ‘혼외정사’를 즐기기 위해(다시 말해 바람피우기 위해) 이혼한 셈이다.
결혼 기간에 내 소설 ‘광마일기’에서 ‘스와핑’을 소재로 다뤄보긴 했다. 그때는 스와핑이란 말이 나오기도 전이었는데, 나는 신통하게도 예언자적(?) 안목을 갖고 부부간 권태를 예방하기 위한 해결책을 제시했던 것이다.
<== 우리의 유전자는 좋은 유전자를 찾아 또다시 헤맨다. 2007년 영화 ‘바람피기 놓은 날’의 한 장면.
솔직히 나는 배우자 몰래 갖는 혼외정사에는 찬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음습한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각자 주말마다 바람피우기로 약속하자는 식으로 ‘스릴 있는 간통’을 즐겨보면 어떨까.
만일 나에게 다시 ‘야한 여자’가 찾아와 동거를 하게 된다면 나는 그렇게 하고 싶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계약결혼으로 평생을 함께 지냈는데, 그동안 각자 ‘떳떳한 혼외정사’를 즐겼다. 어쩌면 그래서 결혼 파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극히 야해진 요즘 세상에서 절대로 혼외정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계율은 있을 수 없다.
우리나라는 모든 게 촌스럽게 돌아간다. 시대착오적인 ‘간통죄’가 지금까지 존재한다는 것도 촌스러운 일이고, 반드시 결혼해야만 행복해진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는 것도 그렇다. 혼외정사를 죄악시하는 것도 촌스럽다.
혼외정사는 권태를 방지하는 ‘짜릿한 각성제’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오히려 부부간 정신적 결속에 큰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이거, 내가 또 욕먹을 얘기를 했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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