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동산

[스크랩] 백두대간 주변의 자연과 문화유산(경남 산청군) - 지리산 대원사계곡 <1>

바라쿠다 2014. 7. 5. 18:23

 

 

 

 

백두대간 주변의 자연과 문화유산

지리산 대원사계곡 <1>

2007년 07월 22일 . 날씨 : 맑다가 구름 많음

 

 

 

30여리에 이르는 대원사계곡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중봉과 하봉을 거쳐 쑥밭재와 새재, 왕등재, 밤머리재로 해서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산자락 곳곳에서 발원한 계류가 암석을 다듬으며 흘러내린다. 조그만 샘에서 출발한 물길이 낮은 곳을 향해 흐르면서 신밭골과 조개골, 밤밭골로 모여들어 새재와 외곡마을을 지나면서는 수량을 더해 대원사가 있는 유평리에서부터 청정 비구니가 독경으로 세상을 깨우듯 사시사철 쉼없이 흐르는 물소리로 깊은 산중의 정적을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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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아래 첫동네라는 새재마을

 

3년전 늦가을에 우리 회원들과 함께 찾었던 곳, 당시에는 곶감이 주렁주렁 달렸었고 산꾼의 집 저곳에서 파전과 도토리 묵에 탁주 한사발로 서로의 외로움을 지리산 자락에 묻고 왔었는데 2년 사이에 이 곳도 무섭게 변해 버려 어느 누가 이 곳을 깊은 산 중이라 하겠는가. 대처의 변두리 마냥 식당과 민박집이 줄줄이 들어 서 자연을 죽이고 있었지만.... 그러나 아직은 기암괴석을 감도는 계곡의 옥류소리, 울창한 송림과 활엽수림을 스치는 바람소리, 산새들의 우짖는 소리가 어우러지는 대자연의 합창을 들을 수 있는 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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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마을에서 바라 본 지리산, 산 머리는 구름에 쌓여 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은 대원사계곡을 일컬어 남한 제일의 탁족처(濯足處)로 꼽으면서 “너럭바위에 앉아 계류에 발을 담그고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먼데 하늘을 쳐다보며 인생의 긴 여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이 보다 더한 행복이 있으랴” 했다. 행정 지명을 따라 유평계곡이라 하지 않고 통상 대원사계곡으로 부르는 연유가 된 것도 수난의 지리산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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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마을 입구에 서 있는 지리산 등산로 안내판

 

조금 전에 다녀 온 대원사는 옛스러움과 정갈한 산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청정 비구니 도량답게 소나무와 대나무로 둘러싸인 주변 경치하며 대웅전 앞의 파초, 원통보전(圓通寶殿)에서 산왕각(山王閣)에 이르는 돌계단과 절 뒤편의 차밭, 그리고 추사 김정희의 힘찬 글씨가 돋보이는 요사채는 피서지 사찰답지 않은 청결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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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를 가득 메우고 있는 민박집과 식당

 

대원사 계곡에 있는 선녀탕, 세신대, 세심대, 옥녀탕 등의 지명도 대원사의 탈속한 기풍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대원사계곡의 깊은 맛은 이러한 외형적인 모습에 있지 않다. 대원사계곡에서 유래한 ‘덕산 유독골' 과 ‘골(계곡)로 갔다’라는 말 속에 우리 민족의 현대사와 지리산을 바라보는 민초들의 심성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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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는 뜻으로 흔히 쓰는 ‘골(계곡)로 갔다’라는 말 역시 골짜기의 깊음과 골짜기에 들어갔다 하면 죽어서야 나올 수 있었던 현대사의 단면을 느낄 수 있다. 빨치산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토벌을 하기 위해 골짜기에 들어갔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빨치산이 되었건 골짜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살아서는 못나왔기에 ‘죽는다’는 말 ‘골짜기로 갔다’의 줄임말인 ‘골로 갔다’를 동의어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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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대원사계곡은 그 골짜기가 깊다 보니 변환기 때마다 중요 피난처이자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화전민이 있었던 이곳은 1862년 2월 산청군 단성면에서 시작해 진주로 이어지면서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한 농민항쟁에서부터 동학혁명에 이르기까지 변혁에 실패한 사람들끼리 모여 그들만의 세상을 꿈꾸며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일제시대에는 항일의병의 은신처가 되었고, 한국전쟁에 이어 빨치산이 기승을 부릴 때는 낮에는 국군의 땅이 되고, 밤에는 빨치산의 해방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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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연을 가진 대원사계곡도 이젠 자동차로 한달음에 계곡의 끝인 새재마을까지 오를 수 있으니 차창 밖으로 보이는 계곡이야 여름이면 더위를 씻어 주는 피서지이고, 가을이면 단풍 구경가는 길일 뿐이다. 계류의 물소리와 바람이 흔들고 가는 나뭇가지의 몸짓에 한많은 역사의 넋풀이를 보는 발걸음이 있다면 옛 화전에서 나는 유평 꿀사과의 향기도 입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정도에서 다시 대간의 이야기로 넘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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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산맥(山脈)이란 용어(用語)가 탄생(誕生)하였을까? 1908년 새로 개정 된 지리 교과서에 "우리나라의 산지(山地)는 종래 구조의 검사가 정확하지 못하여, 산맥의 높이가 태반 오차를 면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일본의 전문대가인 야쓰쇼에이(矢津昌永)의 지리를 채용하여 산맥을 개정하노라"하였고 여기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03년 일본의 마수(魔手)가 조선을 덮치고 있을 때에 일본의 지리학자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의 <한반도의 지질구조도(韓半島의 地質構造圖)>라는 것에서 비롯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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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보고서에 태백, 소백, 차령 등의 산맥 이름이 생겨 났던 것이다. 그 어처구니 없는 녀석은 1900년과 1902년 두 차례, 14개월에 걸쳐 한반도 전 국토를 당나귀 등을 타고 다니며 완벽(?)하게 조사하였다고 한다. 아무리 손바닥만한 나라라고는 하지만 당시의 기술수준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결국 이 조잡한 연구 결과가 조선 지리학의 기초였던 산경표(山經表)를 밀어내고 교과서에 까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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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보고서가 지리학적 연구가 아닌 지질학적 연구라는 점이다. 이미 그들에게 조선의 식민지화는 기정 사실이었고 그 때를 대비하여 지하자원까지 수탈하기 위한 연구는 지질학일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맥을 쫓아야 금도, 철광석도 있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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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세월이 흘러 일제 강점기 때의 작태를 보면 그들은 맥을 쫓아 중요한 혈마다 철 기둥을 박지 않았던가... 땅 속으로 수 천년 도도히 흘러 내리던 백두의 기운을 끊어 내고 민족혼마저 말살하려는 준비를 한일합방 이전부터 그들은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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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성씨나 이름을 바꾸고 나아가 산줄기의 이름과 지역의 지명 등을 바꾸는 것이 그렇게 시급하고 중요했던 이유는 민족(民族) 자존심(自尊心)의 말살(抹殺)이었고 오천년 이어 온 역사(歷史)의 단절(斷絶)이었으며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던 문화(文化)와 전통(傳統)의 상실(喪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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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에게 물려 받은 성이나 이름마저 갈아야 했던 시기에 백두대간(白頭大幹)이 태백산맥(太白山脈)으로 둔갑하였다고 하여 무엇이 달라졌을까... 아마도 격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내 살던 고향의 뒷 쪽을 지나가던 산줄기가 태백이나 소백으로 바뀐 것을 알고 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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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듯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실존하는 산과 강을 기초하여 만들어 졌던 지도는 땅 속의 지질구조선에 근거하여 지상의 산들이 분류되고 산에서 산으로 이어지던 산줄기는 도중에 만나는 강에 의하여 잘려지며 그러다 보니 실제 지형과도 맞지 않은 엉뚱한 그림이 그려지기도 하며 지리부도(地理附圖)가 사실은 지질부도(地質附圖)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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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땅 속의 맥을 기준으로 삼은 지질구조선은 강(江)도 그대로 건너가며 심지어 바다를 건너서 까지 일직선으로 그려져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백두산(白頭山 . 2,744m)에서 뻗어 내려 두류산(頭流山 . 2,309m)까지 달려간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은 동해바다로 빠져 버리고 두류산에서 시작하여 경기만(灣)의 바다에 침강(沈降)하여 여러 섬을 형성한다는 마식령산맥(馬息嶺山脈)은 서해바다를 건너 뛰어 강화도까지 힘차게 달려 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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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산이 물을 건너지 못해 구불구불 이어지는 지리적 특성을 무시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지맥을 기준으로 땅 위의 산줄기를 그리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문제였던 것이다. 지하에 묻힌 지질 구조선을 기준으로 하기에 산맥의 개념에는 산과 강이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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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산줄기에서 발원한 물줄기도 그 흐르는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이름의 강에 합류되고, 강이 넓으면 마주 보이는 강변에서 사는 사람들의 문화가 전혀 다르게 형성되기도 하였는데 하물며 높은 산줄기가 가로 막은 이쪽과 저쪽의 인문적, 문화적 특성이 같을 수 있겠는가... 나아가 예전에 그 산줄기는 국가의 경계가 되기도 하였고 지금도 도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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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종주를 시작할 백두대간은 백두산을 시점으로 동해 쪽으로 뻗어 나와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강원도 태백산 부근에 이르러 서쪽으로 기울어가며 남쪽 내륙의 지리산까지 이르는 거대한 산줄기로 , 반도인 우리의 땅을 대륙과 이어 주는 뿌리이며 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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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ktsnh0330
글쓴이 : 김태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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