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위에 링크한 동영상은 프랑스 가수 필립의 노래입니다. 가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섹스'로만 채워져 있어서 일명 쎅서송이라고 불리죠. 분위기가 이 게시물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넣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동영상은 이동형 작가와 이박사, 세작 3인이 함께 하는 팟캐스트 방송인 '이이제이' 시리즈 중에서 정인숙 특집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면서 함께 들으시면 정인숙 사건을 보다 잘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아래 글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다, 미국으로 망명해서 박정희의 비리를 폭로하다 파리에서 의문의 행방불명을 당한 김형욱의 회고록 3권과 이동형 작가의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 VS 김영삼>에서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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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 밑에 인격이 있는가?"
위의 말은 원조 가카인 박정희가 살아생전에 즐겨썼던 말이라고 합니다. 뭐, 사실 저 말도 박정희 본인이 처음 지어낸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쓰인 표현이 한국으로 건너온 것이죠. 하지만 이 글은 그런 출처나 유래를 일일이 따지는 게 목적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고...
박정희는 18년 동안 철권 통치를 하면서 무수한 정적들을 탄압했지만, 여자 문제는 거의 들추지 않았습니다. 이는 박정희 본인의 여자 관계도 무척 복잡하다 보니 남의 여자 문제를 섣불리 건드리기가 민망했기 때문이었죠.
따라서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의 고위 정치인들은 여야 할 것 없이 요정에 드나들며 접대부들과 성관계를 갖는 것이 일상화될 정도였고, 그런 이유로 한국 상류층의 성윤리는 매우 문란했습니다. 오죽하면 이런 한국의 방탕한 유흥 문화를 두고 일본에서 비아냥거리는 소리까지 나왔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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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1월 3일, 나는 세계 일주에 나섰다. 우선 맨 처음 도착지는 일본 도쿄였다. 나는 일본 정계의 거물인 고다마 요시오와 함께 어느 조촐한 일본 술집에서 술자리를 같이 했다. 그는 대뜸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김부장. 나 할 말이 있소."
"말씀하시지요."
"듣자하니 박 대통령이 지나치게 계집질을 좋아한다는데 그게 사실이오? 사실이라면 한 나라의 지도자로 곤란한 일이외다. 누구라도 색도(色道)가 지나치면 곤란하지, 곤란해."
고다마는 다짐하듯 큰소리로 말했다.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가끔 적적해서 객고를 푸는 수는 있었겠지요."
"객고를 푸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일본에 이렇게 소문이 많이 돌고 있소? 박 대통령이 오입하는 걸 좋아한다는 얘길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하오."
"그래요?"
"글쎄 내 말이 그렇다니까. 상당히 구체적인 소문들이 많아요."
"그거 큰일이군요."
(중략)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바람을 많이 피운다는 소문이 이웃 나라에서 자자하면 이는 실로 국가 원수의 체통에 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까지 소문이 분분하다면 국내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다만 국민들은 정부의 눈이 무서워서 속으로 쉬쉬하고 있겠지.'
- (김형욱 회고록 3권, 235~244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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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고위 정치인들의 요정 정치 그 자체는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라 엄밀히 따지면 일본 정치인들도 할 말이 없을 지도 모릅니다만, 여하튼 저런 말이 나올 정도로 1970년대 한국 정치권의 성문화는 난잡했습니다. 이런 문란하고 방탕한 사회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1970년 3월 17일 벌어진 정인숙 피살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26세의 한창 젊은 나이였던 정인숙은 서울의 강변북로에서 총에 맞은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경찰의 수사 결과, 그녀의 소지품에서 30여장의 명함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터집니다. 정인숙이 가지고 있던 명함들에 정부 고위 관리들의 이름이 잔뜩 있었던 것이었죠.
게다가 공식적으로 결혼도 안 한 상태인 정인숙에게는 아비 모를 세살짜리 아들이 하나 있었고, 직업도 없던 정인숙은 고급 집에 고급 승용차까지 가지고 있었죠.
(정인숙 피살 사건을 다룬 신문 기사.)
이 사실이 각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세간에서는 대체 정인숙이 어떻게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와 성관계를 맺고 아들을 낳게 한 남자가 대체 누구인지를 놓고 온갖 소문들이 난무했습니다.
정인숙 피살 사건이 얼마나 장안의 화제였느냐 하면, 당시 가수 나훈아의 인기 노래인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를 바꾼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영원히 우리만 알았을 걸 죽고 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라는 유행어가 퍼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국회에서도 이 노래 가사가 화제가 되었는데, 신민당 의원 조윤형이 본회의에서 저 가사를 부르면서 국무총리 정일권을 가리키고 "내가 존경하는 정 총리입니다만, 지금 세상에서는 모두가 이 양반의 아들이라고 그럽디다."라며 정일권이 정인숙과 간통을 하여 아들을 낳게 한 것이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정일권 본인은 인정하지 않았죠.
(정인숙의 사진. 그녀는 뛰어난 미모와 육감적인 몸매, 그리고 훌륭한 영어 실력을 모두 갖춰 매우 명성이 높던 호스티스였다고 합니다.)
1970년 한국에서 가장 큰 화제가 되었던 여인, 정인숙. 대체 그녀는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던 걸까요? 지금까지 각종 언론과 서적들을 통해 알려진 내용을 종합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정인숙의 본명은 정금지로 1945년 2월 13일, 대구 부시장을 지냈던 정일수의 6남매 중 다섯 번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정일수 부부는 정인숙 위로 아들만 넷을 두었는데, 딸인 정인숙이 태어나자 무척 귀여워했습니다. 그래서 정인숙은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매우 콧대가 높은 부잣집 딸로 자랐습니다.
하지만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정일수 집안은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산을 빼앗기고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정인숙도 이 때, 자신의 진로를 놓고 방황하다가 1962년 대구 신명여고를 어렵게 졸업하고, 미스코리아나 영화 배우가 되어 보려고 했지만 결과는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미스코리아 입상에 실패하고, 영화에 몇 번 단역 배우로 나갔지만 유명세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던 1964년, 20살의 나이였던 정인숙은 당시 인기있던 방송 작가인 장사공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물론 이는 정인숙이 장사공을 만나기 위해 방송국 밖에서 5시간이나 기다릴 정도로 열렬한 구애를 한 결과였습니다.
정인숙은 장사공의 아이를 임신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지만, 둘의 행복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인기 작가라도 장사공의 수입은 매우 불규칙적이었는데다, 부잣집 딸이었던 정인숙의 지나친 사치벽을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사공은 정인숙에게 "우리가 지금 아이를 낳아 키울 경제적인 형편이 못 되니, 아이를 낙태해라."고 권유를 하기까지 했습니다. 정인숙은 그 요구를 받아들였고, 정인숙과 장사공의 아이는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여기에 정인숙의 콧대 높은 거만함에 질린 장사공이 바람을 피우다가 들키는 일까지 벌어지자, 결국 정인숙은 장사공과 헤어졌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정인숙이 오빠인 정종철에게 고백한 바에 따르면 "장사공과 사귈 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하니, 정인숙의 사랑은 진심이었던 듯합니다.
장사공과 헤어진 정인숙은 돈줄이 끊겨 곤경에 처했습니다. 당시 정인숙 집안은 완전히 몰락한 후라서, 정인숙이 어릴 때 부렸던 가정부나 하녀도 모두 집을 떠난 상태였죠.
그러자 정인숙은 돈을 벌기 위해서 고심을 하다가, 자신의 뛰어난 미모와 육감적인 몸매를 이용한 최고의 직업인 요정 접대부로 나섰습니다. 이 때 이름도 정인숙으로 바꾸었는데, 그녀를 본 외국인을 비롯한 고위 권력자들은 이내 그녀의 황홀한 매력에 빠져 들었습니다.
물론 당연히 정인숙은 수많은 남자들과 성관계를 가졌는데, 이 때 그녀는 여러 번 임신을 하고 낙태 수술을 했다가 결국 1968년 아들인 정승일을 낳았습니다. 정승일의 아버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분명히 요정에 드나들며 정인숙과 놀아난 한국의 고위 정치인이었겠지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정승일의 출산은 정인숙에게 매우 큰 호재였습니다. 왜냐하면? 정인숙은 자신과 성관계를 가진 고위층 남자들이 무수히 많다는 점을 무기로 삼아서, 돈이 필요하면 그 남자들에게 연락해서 "내가 낳은 아이가 당신 아이일지도 모른다. 그러기 아이를 키우기 위해 나한테 돈을 보내달라. 안 그러면 당신과 나의 관계를 모두 폭로하겠다."라고 협박을 한 것이죠. 그러자 행여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 망신을 당할까봐 두려운 권력자들은 그녀가 요구하는 대로 돈을 꼬박꼬박 보냈고, 덕분에 정인숙은 정승일을 키우기 위해 요정에 나가는 일을 그만두고도 고급 주택과 자동차를 구입할 만큼,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습니다.
(피살 당시의 정인숙, 26세)
당시 정인숙이 얼마나 한국의 정치권에서 얼마나 유명하고, 또 그녀와 하룻밤을 같이 보낸 남자들이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을 하나 들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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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방문지인 미국에서는 중앙정보부 간부를 지낸 양두원과 최홍태가 나와서 나를 극진히 맞이해주었다.
"부장님, 이곳 워싱턴에서도 정씨 성을 쓰는 정체불명의 여자가 하나 있습니다."
최홍태의 말에 나는 섬뜩 오한을 느꼈다.
"그래? 어떻게 해서 온 여자인데?"
"현재 워싱턴 한인회장인 노진환이 데려왔는데, 그가 빚 때문에 공항에서 잡혀가는 통에 정씨 여자가 갈 데가 없어서 며칠 동안 저의 집에 묵도록 했습니다. 나중에 노진환이 풀려나와서 일주일 동안 데리고 잤다는데, 이 여자가 보통 여자가 아닌 모양입니다."
"보통 여자가 아니라니?"
"우선 미모가 보통이 아닐 뿐더러, 데리고 온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 아이의 아버지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 콧대가 보통 세지 않고요. 이 여자 때문에 문학림 실장이 자꾸 전화합니다."
"문학림이?"
문학림이라면 내가 정보부장일 때, 나의 비서실장으로 있다가 일본 훗카이도 파견관으로 나가 있던 인물이었다.
"문학림 실장이 일주일에도 몇 번씩 전화해, 그 여자 잘 보살펴주라고 신신당부하고 있습니다. 여권도 문 실장이 마련해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괘씸한 친구. 문학림이 그러니까 내가 부장일 당시에 그 여자의 여권을 준비해준 것 아니야."
(중략)
"그 정인숙이라는 여자 얘기 나도 좀 들어봅시다. 그 여자가 그렇게 좋다며?"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묻자, 노진환은 술술 말문을 열었다.
"사실은 제가 한 일주일쯤 데리고 있었지요."
"일주일씩이나?"
"그 여자는 피부가 대리석 같아요. 나이가 스물너댓 정도인데 육체가 기가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제 평생 그런 여자는 처음 보았습니다."
"그렇게 대단했나?"
"그뿐인 줄 아십니까, 그 여자는 님포메니아였어요."
"그게 무슨 뜻이오?"
"색정광여인이란 뜻이지요. 남자 없이는 하룻밤도 못자는 여자입니다."
"저런!"
"그냥 자꾸만 해달라고 밤새도록 붙들고 있는 통에 제가 녹아웃 돼버리고 말았지 뭡니까. 곯아떨어져 자다가도 어쩐지 불편해서 눈을 떠보면 제 성기를 입으로 물고 미친 듯이 빨고 있질 않았겠어요? 정말 제가 그러다간 죽을 것 같아서 나중엔 도망쳐버렸습니다."
"허허, 대단한 여자였던 모양이군. 듣자하니 가문도 상당하고 아버지가 대구 부시장을 지낸 적도 있었다는데 아마 천성적으로 남자를 좋아해서 색도로 나선 모양이구려."
"그 여자 말에 의하면 자기가 박정희 대통령, 정일권 국무총리, 김형욱 부장, 박종규 실장 등 내노라하는 권력자들과 모두 관계를 맺었다고 우쭐대던 걸요. 전화번호까지 가지고 다니고."
"뭐요? 이것 보시오, 노진환 씨!"
나는 드디어 노기를 띠며 노진환을 쏘아보았다.
"내가 반평생을 오입 한 번 안 한 도덕거사는 아니오. 나도 젊은 시절, 말술을 불사하는 주호가였고 미인을 즐기는 풍류도 있었소. 그러나 그 정인숙이란 여자는 내 평생 본 일이 없소. 당신 아무데나 그런 무책임한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마시오. 알아듣겠소?"
- (김형욱 회고록 3권: 240~250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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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은 지금처럼 해외 여행이 자유화된 상태가 아니라서, 해외로 나가려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따라서 여권은 보통 사람이 아닌 상당한 부와 권력 및 인맥을 가진 사람들이나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정인숙이 여권을 발급받았다는 것은, 곧 그녀가 무수한 권력자들과 어울리면서 그들과의 인맥을 이용해서 상당한 특혜를 받았던 몸이었음을 증명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인숙은 노진환을 비롯하여 당대 한국의 유명한 권력자들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소문이 파다했는데, 오히려 이를 자랑으로 여기고 "내가 낳은 아들의 아버지는 상상도 못할 사람이다!"라고 말하길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위에서 노진환이 정인숙을 가리켜 색정광여인이라고 하는 부분이 있는데, 실제로 정인숙은 피살된 바로 그 날에도 두 명의 남자와 성관계를 가졌고, 남자 성기 주위의 털이 목구멍에서 발견되었을 만큼 섹스에 탐닉했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섹스 중독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건 그렇고, 정인숙과 관련해서 가장 큰 화제는 단연 그녀가 낳은 아이의 아버지가 대체 누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그녀와 잤을까?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김형욱은 자신의 회고록 3권에서 정승일의 아버지는 박정희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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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끝내 정인숙을 누가 죽였는지, 그녀가 낳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밝혀내지 못했다. 사실 그 사건은 어느 누구도 심지어 직접 사건과 관련된 노진환, 문학림, 최대현마저도 알아낼 수 없도록 교묘히 계획되었고, 결정적인 단서와 물증을 차근차근히 없애가며 추진된 완전범죄였다. 이미 중앙정보부장을 그만둔 나로서는 그 이상 사건의 핵심에 접근할 방도가 없었다.
다만 정인숙이 피살된 직후, 아들 정승일은 외할아버지인 정일수와 함께 일본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아무런 직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계속 넉넉한 생활비를 보내준 덕분에 풍족하게 살았다. 이로 보건대, 정인숙과 관계를 가지고 정승일을 낳게 한 남자는 정승일과 정일수에게 많은 돈을 보내줄 정도로 상당한 권력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할 만한 권력자는 대체 누구일까? 대통령 박정희인가, 아니면 국무총리 정일권인가?
문제의 아이인 정승일이 정일권의 아들이었다고 치자, 당시 정일권은 과연 그만한 일을 감행할 만큼 국정에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가? 그 뒤 정일권은 국회의원 자격도 없는 노진환을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밀어놓고 일등공신 최대현을 청와대 사정담당 특별보좌관실에서 박정희의 비서로 일하게 할 만큼, 정치적으로 강력했던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 의문들에 대한 나의 대답은 결단코 '아니다!'였다.
- (김형욱 회고록 3권: 259~261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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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뿐만 아니라 김형욱은 정승일과 직접 만난 정일권이 "당신은 내 아들이 아니라,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이라고 말한 점을 들어, 당시 국무총리인 정승일이 모시던 유일한 사람인 박정희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동형 작가는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 VS 김영삼>에서 정승일의 아버지는 박정희가 아닌, 정일권일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박정희는 정인숙 피살 사건을 듣자, 철저하게 수사하라고 했다. 만약 박정희 본인이 정승일의 아버지라면, 과연 그런 명령을 내렸겠는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지도 모르는데?
2. 정인숙의 가족, 그러니까 정승일의 외가 식구들도 모두 정승일의 아버지는 정일권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정일권은 정인숙 가족들에게 여러 차례 계속 많은 돈을 대주었다.
3. 정승일은 나중에 어른이 된 다음, 한국에 와서 자신의 아버지라는 남자와 직접 만났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 때는 1990년대로, 이미 박정희는 죽고 없었다.
4. 정승일이 정일권과 만났을 때, 정일권은 "아가야! 지금 내 심정이 워낙 복잡해서 뭐라고 말할 수 없다. 나중에 다시 오거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역시 정황상을 고려한 추측일 뿐, 정승일이 정일권의 아들이라는 확고한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결국 정인숙과 관계를 맺어 정승일을 낳게 한 남자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정인숙 본인도 모를 수 있습니다. 짧은 시간에 워낙 많은 남자들과 성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정인숙 피살 사건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언급할 부분은 그녀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경찰의 수사 결과와 법원의 판결에 의하면, 범인은 정인숙의 오빠인 정종욱이라고 합니다. 정종욱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직업이 없어 여동생인 정인숙이 타는 코로나 승용차의 운전기사로 일하며 그녀로부터 근근이 용돈을 받아 살았는데, 정인숙의 방탕한 성생활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녀에게 충고를 했다가 오히려 모욕과 무시를 당하자 홧김에 죽였다는 것이죠.
그러나 정종욱은 나중에 자신의 진술이 경찰과 권력자들의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한 거짓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정인숙을 총으로 쏜 범인은 두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은 여동생인 정인숙을 결코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한 정종욱의 항변이 실린 신문 기사)
생각해 보면, 정인숙 피살 사건의 진상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박정희든 정일권이든 한국의 권력자들은 미모의 접대부인 정인숙과 놀아나다가 그녀가 아들을 낳자, 처음에는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날까봐 그녀가 원하는 대로 돈을 줬다가, 점차 계속 돈 요구를 하는 그녀가 눈에 거슬렸고, 혹시 그녀가 폭로를 하여 정권에 악영향을 주는 일을 막기 위해 서로 짜고서 그녀를 죽였던 것이 아니었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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