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고 싶은 음악

[스크랩]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y 양희은 열전

바라쿠다 2016. 11. 27. 06:05

 

                                                    

먹고 살기 위해 가수가 된 양희은

 

 

양희은 열전

 

 

1952년 8월 13일, 무더운 여름에 양희은은 육군 대령 집안의 맏딸로 태어났다.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을 정도로 엘리트였던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양희은에게 클래식을 비롯해 많은 음악을 들려주었고 종로에서 노래 잘 부르기로 유명했던 어머니는 양희은을 데리고 항상 동요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가정이 채 10년도 가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1961년, 그녀가 10살 때 부모는 이혼을 했고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집을 나와야 했다.

아버지와 떨어지는 순간부터 가혹한 생존경쟁에 휩싸여야 했던 양희은은 동생 양희경과 함께 어머니의 일을 도우며 끼니를 연명해야 했고 어렵사리 마련한 가게에 화재가 나는 등 가난을 두루 겪어야 했다.

그리고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몸 한 쪽이 약간 이상한 그녀는 웃을 때도 한 쪽만 웃고 술을 마셔도 한 쪽만 빨개진다고 한다. 

 

어두웠던 그녀의 삶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온 때는 바로 19살 되던 1970년이었다.

단순히 돈을 벌고 싶었던 그녀는 당시 잘 나가던 송창식을 찾아갔고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게 된다.

경기 여고 다닐 때부터 이미 노래와 끼로 유명했던 그녀.

한 시대를 풍미한 '포크가수' 양희은의 탄생이었다.

 

 


 

김민기를 만나고, 음악을 배우다.

 

 

송창식을 만난 그 때, 양희은은 그녀의 음악 세계와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한 명의 작곡가를 만나게 된다.

한국 대중문화 역사의 살아있는 천재, 김민기가 바로 그였다.

한국 대중문화 역사상 가장 독재정권의 배척을 받았던 진정한 예술인.

양희은과 김민기의 만남은 한국 포크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신 독재가 시작되고 시대 상황이 암울해지던 그 때, 김민기와 양희은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느 날 밤, 우연찮게 김민기를 찾아간 양희은은 김민기가 부르던 노래에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울렁거림을 느꼈다고 한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김민기는 부르던 노래의 악보를 찢어 바닥에 버렸지만 양희은은 그 악보를 테이프로 일일이 다시 붙였다고 한다.

그 노래가 한국 가요계에 길이길이 남을 명곡이 될 줄이야.

 

이 곡이 바로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로 유명한 노래, 아침이슬이었다.

통기타와 청바지, 맑고 청아한 목소리, 암울한 시대의 빛나는 저항정신을 노래한 그녀의 아침이슬은 군사 독재 정권의 억압과 강요된 굴종을 넘어서는 시대정신의 심벌이 됐고 그녀는 가수로 급성장했다.

스무 살, 막 터질 듯한 꽃봉오리 같은 그녀가 불렀던 아침이슬이 시대를 울리고, 사람을 울리고, 70년대 가장 사랑 받는 포크 송으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김민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역시 가수 양희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는지...  

  

김민기라는 한 시대의 걸출한 인물을 만나면서 70년대 가장 뛰어난 포크 가수로 성장한 양희은은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면서 아침이슬을 비롯해 그녀의 많은 곡들이 금지곡으로 됐지만 대중들은 길거리에서, 학교에서, 집안에서, 마음속에서 그녀의 노래를 끊임없이 불렀다.

 

'노래로 할 이야기가 사랑밖에 없다면 난 노래를 하지 않았다.'던 양희은의 당찬 마음은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받으며 도피 생활을 하던 김민기와 그의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 했던 양희은.

 

높은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지만 돈을 벌지 못했던 양희은은 여전히 가난했고 결국 81년 가수 생활을 접고 해외 여행길에 오른다.

하지만 1년 만에 그녀는 예전의 밝고 건강한 모습이 아닌 환자의 모습으로 고국에

쓸쓸히 돌아왔다.

병명은 난소 암 말기.

그녀의 인생에 불어 닥친 가장 큰 시련이었다.

 

청바지에 통기타를 들고 노래하던 긴 머리 소녀는 82년에 조용히 병상에 누웠다.

두 번에 걸친 수술과 힘겨운 항암 치료로 머리카락은 빠지고 예전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는 힘을 잃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힘겨운 투병생활 속에서도 그녀는 84년 하얀 목련을 발표해 히트를 쳤고 희망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희망은 절망이 되고, 슬픔은 웃음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라 하지 않던가. 

 

어느 날 밤, TV 탤런트이자 뮤지컬 배우로 성장한 동생 양희경이 병실을 지키고 있다가 양희은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다고 한다.

양희경이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고 양희은은 천장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고 한다.

"희경아...... 언니 먼저 간다...... 잘 있어......"

 

지루한 항암치료와 대 수술로 인해 말할 힘조차 없었기에 입 모양만 겨우 움직였던 그 때 기적처럼 동생 양희경이 벌떡 일어났다고 한다.

"언니, 나 두고 어디가!"

 

그것이 양희경이 깨자마자 외친 소리였고 양희은은 다행히 응급조치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도 듣지 못한 그 목소리를 잠들어있던 동생 양희경은 들었던 것이다.

양희은의 말대로 기적이라고 밖엔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그래서인지 항상 양희은, 양희경 자매는 말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결혼하고, 이민을 가고, 그리고 50대. 

 

 

기적적으로 암을 극복하고 건강을 되찾은 양희은은 87년, 지금의 남편 조중문 씨를 만나 미국으로 떠났다.

남편은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줬고 만난 지 3주 만에 초스피드로 결혼했다.

양희은에게는 무엇보다도 안식처가 필요했고 남편은 그런 양희은에게 가장 적합한 존재였다.

근 10년 동안 미국에서 생활했던 양희은은 93년 다시 한국으로 조용히 돌아왔다.

암울한 시대에 자유를 노래했던 소녀는 30대에 암을 앓고, 결혼하고, 이민을 갔다가 40대가 돼서야 다시 대중의 품에 안기게 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비슷한 시기에 김민기 역시 자유의 몸이 되어 극단을 세우고 예술혼을 불태웠으니 이들의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다.

 

한국으로 돌아와 그녀가 다시 시작했던 일은 당연히 노래였다.

95년도에 드라마 '목욕탕 집 남자들'이 히트하면서 동생 양희경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자 '예전엔 희경이가 내 동생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희경이 언니가 됐네.'라고 말할 정도로 시대는 변했지만 90년대에도 여전히 그녀의 노래는 많은 사람들에게 통했다.

그녀는 라이브 홀을 만들어 라이브 문화를 선도했고 전 관객수 매진을 기록하면서 공연 제작자들을 놀라게 했다.

서태지, H.O.T. 그리고 핑클이 나오던 그 시절에도 여전히 양희은은 포크 계의 대모였고 살아있는 전설이었던 것이다.

공연관계자들은 '양희은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공연문화의 흐름이 바뀌었다.'라고 말한다.

그녀가 지금도 가요계의 공로상을 받고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에 노래했던 가수였기 때문이 아니라 공연 문화를 개척하고 한국 대중문화사를 다시 쓴 개척자였기 때문이다.


 

블로거 뉴스에서 정리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양희은

 

출처 : 캄보디아 은퇴 이민 공동체
글쓴이 : 부에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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