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유 26
하우스에서 진호에게 아무런 다짐도 받지 못해서인지는 몰라도 유난히 춥게 느껴지는 날씨다.
윤철 선배와 함께 서울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한적한 도로가에는 차가운 바람마저 불고 있다.
" 벌써 버스가 끊겼나? 저기 삼거리까지 가 보자구.. "
" 응, 선배.. "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기다리던 버스가 오질 않자 선배가 저 멀리 도로가 합쳐지는 삼거리까지 걸어가잔다.
" 넌, 어쩔거야? "
" 뭘.. "
" 진호가 좋다며, 그 놈은 뭐라는데.. "
" 글쎄, 잘 모르겠어.. 선영이도 남의 여자가 된지 오랜데, 아직도 찌꺼기가 남은건지.. "
아무리 좋게 생각을 해주려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학때부터 진호에게 마음을 주고 싶었지만 이미 그의 곁에는
선영이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주변의 친구들이 부러워 할만큼 그들의 애정은 돈독했기에 어찌해 볼 엄두가 나질 않아
그저 속으로만 그 감정을 숨겨야 했던 성희였다.
서로가 갈길을 가야 했고, 시간이 흘러 진호와 선영이가 남남이 된 지금 예전의 아련했던 감정의 미련이 피어났다.
비록 다리를 저는 몸으로 나타난 진호지만 나를 매료시켰던 깊고 그윽한 눈빛만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성격차이로 전 남편과 이혼을 한 후,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부평초마냥 떠 도는 이 마음을 진호에게 싣고 편안하게 정착을
하고 싶었다.
" 어디 쉽게 없어지겠냐.. 그렇게 죽고 못살던 사이였는데.. "
" 그렇다고 이제와서 어쩌겠어, 민수선배랑 결혼하고 애까지 낳았는데.. "
" 둘 사이에도 수경이가 있잖어, 선영이는 그 애가 눈에 밟혀서 못 견디는 모양이더라.. "
" 두 아이를 다 챙길수야 없잖아, 자기 형편에 맞춰 살아야지.. 만약에 시댁에서 알게라도 되면 난리가 날텐데.. 선영이도
그만 자기 갈 길을 가는게 옳다고 생각해.. "
" 글쎄다, 쌓인 정이란게 어디 그렇게 칼로 자르듯이 매듭이 쉽다든.. 어! 저거 선영이 동생 아니냐? "
앞에 보이는 삼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깜빡이를 켜고 있는 차는 분명히 선영이의 동생 치영이의 승용차다.
차 안에는 희미하게나마 치영이의 실루엣은 보이는데 같이 있어야 할 선영이가 보이질 않는다.
" 근데, 왜 혼자야.. 선영이는 없구.. "
이윽고 신호가 바뀌자 아무일 없다는 듯 치영이가 운전을 하는 차가 출발을 한다.
" 진호네 집에서 자고 가려나 보지.. "
" 어머나, 말도 안돼.. "
이래서는 안되는 일이지 싶다. 진호에게 온갖 공을 들이고 있는 판에 선영이가 그를 붙잡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 봐, 여기서 보이잖어.. 틀림없어.. "
" 에이, 아무리.. 그 시간에 뭣하러 여기까지 왔겠어.. "
" 모르지, 그치만 확실해.. "
수년 동안을 한시도 잊은적이 없었던 선영이는 이미 민수 선배의 여자가 되어 아이까지 낳아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고는 며칠 밤낮을 뜬 눈으로 새워야 했다.
선영이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머리속을 맴돌았지만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께서 죄없는 선영이를 탓하지 말라는 당부를 듣고서야 비로서 아픈 결심을 해야 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선영이에게 마음의 짐을 안겨주지 않고,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기로 다짐을 하고는 마지막으로 한번만
만나 보기로 작정을 했다.
그러던 것이 수경이를 만나 본 선영이가 딸아이에게 죄책감이 든다며 잠시나마 챙겨 주겠노라고 고집을 부려 여기까지
이른것이다.
" 그러길래 그만 오랬잖어, 이제 어쩌냐.. "
" 됐어, 진호씨나 맘 단단히 먹어.. "
" 나야 무슨 상관이야, 니가 문제지.. 민수 선배가 널 곱지 않게 볼텐데.. "
선영이의 행복을 위해 그토록 힘든 아픔까지 참아내 가며 물러서 주기로 작심을 했는데, 나로 인해 다시금 그녀를 힘들게
만들수는 없는 노릇이다.
" 괜찮아.. 그 사람은 미리부터 알고 있었을거야.. "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 눈치가 그랬어.. 술이 잔뜩 취해서 날 안았는데 평소때와는 좀 다른 느낌이랄까.. "
" 그랬더라면 진작에 멈췄어야지,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어쩌려구.. "
자신의 아내가 전 남편과 부둥켜 안고 있다면, 그걸 용서해 줄 남자는 없을것이다.
더군다나 민수 선배는 선영이와 결혼을 하기 위해 이미 아이까지 낳은 그녀를 멀쩡한 처녀로 만들기까지 한 사람이다.
모르긴 해도 그 충격은 클수밖에 없을것이다. 더불어 배신감을 느낀 그가 선영이에게 나쁜 맘이라도 갖는다면 다시 한번
힘든 일을 겪을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바짝 애가 타 들어간다.
" 나도 몰라, 이혼하기 밖에 더 하겠어.. "
" 얘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
" 그만하고 안아나 줘, 딴 생각하기 싫어.. "
비닐 하우스 안, 작은 방으로 들어 온 선영이가 가슴 안으로 안기어 온다.
" 자, 앞으로 잘들 부탁해.. "
" 축하해요,형부.. 언니두.. "
" 형부가 뭐니, 사장님이라고 해야지.. "
" 아무렴 어때, 다 아는데.. "
룸싸롱의 이름을 데킬라로 이름 짓고 그럴듯한 조명까지 넣고 보니 제법 멋들어져 보인다.
오픈을 이틀 앞 둔 시점에서 최종적인 점검을 하는 날이라 가장 큰 룸에 앉아 가볍게 한잔 하기로 했다.
십여평쯤 되는 룸이 3개에 이십여평이 넘는 룸도 두개나 있고, 아가씨들이 편히 쉴수 있는 작은 대기실도 마련했다.
지배인과 웨이터들은 소소한 마무리를 하며 카운터와 홀, 각 방들을 돌며 점검중이고 인희와 연희, 미연이랑 넷이서 가장
멋들어진 룸에 모여 자축을 하는 중이다.
" 그래도 니들만 알고 입조심들 해.. 특히 가게에서는.. "
" 언니도 참, 신경 꺼.. 우리도 산전수전 다 겪은 년들이야, 그 까짓 눈치 없을까.. "
연희가 느물거리며 인희를 놀리고 있다. 저 어린것과 두번씩이나 인희 몰래 몸을 섞고 보니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 나머지 애들은 언제 오나? "
" 내일.. 강북에서 잘 나가는 애들 둘하고 예전부터 알던 애들 넷이 오기로 했어.. 선금은 준비됐지? "
" 응, 다 해 놨어.. "
내 앞으로 된 지분중 일단 10억을 달라고 했는데 형이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인희와 약속을 한 마당이라 큰소리는 쳤지만, 내일까지 1억을 준비해야 하는게 쉽지 않을것 같아 걱정이 태산이다.
혹시나 싶어 은행에 있는 친구에게 집을 담보로 부탁은 해 놨지만 시간이 촉박해서 그마저도 어렵지 싶은 요즘이다.
" 사장님~ 주류회사에서 사람이 왔어요.. "
밖에서 오픈 준비를 하던 웨이터 하나가 들어와 인희를 부른다.
" 그래 알았어, 금방 나가.. "
내 앞으로 사업자를 내긴 했지만, 명목상으로는 인희를 앞세워 장사를 하는게 여러모로 편리하지 싶어 가게에서는 그녀가
사장 행세를 하기로 했다.
" 잠깐 나갔다 올께, 술 조금만 마셔.. "
인희가 출입구 문을 열고 나가려다 말고 몸을 돌리고는 나를 보며 단속까지 한다.
" 참, 별 참견을 다 한다니까.. 누가 보면 와이프인줄 알겠네.. "
룸 밖으로 인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연희가 볼멘 소리를 해 댄다.
" 또 그런다, 그러다 눈 돌아갈라.. "
" 그렇찮어, 오빠가 자기것도 아닌데.. "
" 어허~ 난 시끄러운건 딱 질색이야.. 너도 그렇게 하기로 했잖어, 인희가 눈치채지 않게 하겠다구.. "
" 그래 연희야, 오빠 말대로 해.. "
" 피~ 알았어.. "
미연이까지 나서서 종주먹을 들이대자 일단은 연희가 수긍을 하는듯 하지만, 괜히 건드렸다는 후회가 남는건 어쩔수가
없다.
" 오늘은 내 차례야 오빠.. "
" .................. "
" 그렇찮어, 가게 오픈하면 이제 시간도 없을텐데.. "
" 오빠는 오늘 죽었다.호호.. "
연희를 달래던 미연이가 복병으로 나선다. 아무래도 이네들과 엮이는게 자꾸 부담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