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유 21
" 손님이 엄청 많네.. "
" 딸이 하나라 시아버지가 신경을 많이 썻어.. "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호텔의 켄벤션 홀을 예식장으로 꾸민 탓에 호화로워 보인다.
TV에서만 보던 젊은 아나운서가 사회를 봤고, 대학교에서 성악과 교수로 있는 테너가수가 축가를 불렀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오늘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의 가족들은, 하객들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돌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중이다.
" 하여간에 부모가 능력이 있어야 돼.. 희수는 좋겠다, 외무고시까지 패스한 신랑을 만났으니.. "
" 시아버지 친구분 아들이래.. "
" 어머, 그럼 중매잖어.. 희수 저 기집애도 되게 응큼하네, 연애 결혼이라고 하더니.. "
" 그랬어? 왜 그랬을까.. "
" 잘난척 하고 싶었겠지.. 어쩐지 수상하더라니, 남자들이 관심을 갖는 얼굴도 아닌데.. "
얼마전 동창회에 나와서는 외무고시를 패스한 남자가 자기를 쫒아 다닌다면서 은근히 자랑을 하던 희수였다.
영문을 모르던 친구들은 그런 희수를 부러워 했고, 모두가 연애 결혼이라고 믿었다.
" 모른척 해.. 괜히 얘기했나 싶다, 얘.. "
" 알았어, 나만 알고 있을께.. 근데, 진호씨는 사람이 왜 그러나 몰라.. 어쩜 고맙다는 전화도 한통 없다니.."
" 경황이 없었겠지.. 이제 며칠이나 됐다구.. "
이틀이나 잠도 못 잔채 선영이를 도와 문상객들의 접대를 도왔다. 너무 피곤해서 화장장까지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일손이 부족한 진호가 염려 돼 그냥 올수가 없었던 것이다.
" 너한테도 연락없었지? "
" 응, 다음주에나 한번 가 보려고.. "
" 민수씨가 갔다 오라디? "
" 원래 일주일에 한번씩 다녀와.. 수경이도 챙길겸.. "
홀아비인 진호가 딸 아이를 챙기는게 힘들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진작에 헤어진 애 엄마가 그 곳을 드나 든다는게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성희다.
" 설마 아직도 무슨 썸씽이 있는건 아니지? "
" ....그럼.. 민수씨도 있는데.. "
부부지간으로 살던 그네들이 수경이를 핑계 삼아 마주치는건, 누가 봐도 곱지 않은 시선일 것이다.
" 얘, 선영아.. "
" 응? "
" 내가 수경이를 맡으면 어떨까? 어차피 진호씨도 혼자 살긴 그럴텐데.. "
" ....글쎄.. 진호씨가 어찌 생각하는지가 문제겠지,뭐.. "
선영이한테까지 허락을 받을 일은 아니지만, 내 의사를 어찌 생각하는지는 떠 보고 싶었다.
" 뭔 소리냐, 회사를 그만 두겠다니.. "
" 어차피 형하고는 맘이 안 맞는걸 아시잖아요, 이번에 독립할래요.. "
희수의 결혼식이 끝나고 본가에 모이게 된 김에 모든걸 정리하고픈 민수다. 부모님이 걱정 하시는거야 이미 예상을
했지만, 큰 맘 먹고 속에 품어 왔던 얘기를 꺼냈다.
" 그런 결정을 너 혼자 내리면 어쩐다니, 니 형을 도와야 할 둘째가.. "
" 냅 두세요, 원래부터 도움이 안 되던 놈이니까.. "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놀래신 표정이지만, 형은 당연한 듯 내 뜻에 동조를 하고 나선다.
눈에 가시같은 내가 없어져야만 자신의 맘대로 회사를 좌지우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 내 지분이나 내 놔, 당장 그만둘테니까.. "
" 지금 돈이 어딨어? 가뜩이나 자금 사정이 안 좋은데.. "
" 내가 빤히 알고 있는데, 죽는 소리는.. 이번 달 안으로 만들어 줘, 나도 투자할데가 있어.. "
날짜까지 못을 박았으니 일단 어느 정도는 나올것이다. 가게부터 계약을 하고 내부수리부터 할 생각이다.
" 어이구 ~ 저 녀석들을 자식이라고 믿은 내가 어리석지, 누굴 탓하겠누.. "
" 얘네들이 아빠 혈압이라도 오르면 어쩌려구 이러는지.. 둘째는 이만 가거라.. "
" 죄송해요, 아버지.. 그치만 형이랑은 도저히 같이 못해요, 이해 하세요.. "
" 나도 싫어, 임마.. "
" 근데, 이 녀석들이.. 아 ~욱.. "
" 여보 ~ 조심해요.. 빨리 안 가니? "
" 알았어요, 이만 갈께요.. "
아버지의 혈압을 높일수는 없기에 서둘러 집을 나서야 했다. 병원까지 실려가게 만들수는 없음이다.
" 어때요, 직접 보니까.. "
" 나와보길 잘했네, 이 정도일줄은 몰랐지.. "
치영이가 꽃 도매시장으로 유명한 양재동을 견학해 보라고 해서 수경이까지 데리고 나왔다.
그동안 비닐하우스에서 동양란과 서양란을 키우기만 했을 뿐이다.
실질적으로 판매 루트가 어찌 되는지에 대한 식견이 부족했던 진호로서는 몇만평이나 됨직한 방대한 시장 크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수천개나 되는 점포들의 활기찬 움직임을 보고는 새삼 깨닫게 된 것도 많았다.
" 기존 거래처에서 반응이 좋아.. 다들 이쁘대.. "
" 니가 많이 힘들겠다.. "
" 힘든게 대순가, 열심히 벌어야지.. 매형이 내 봉급 올려준다며? "
" 그래야지,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후후.. "
새로 접목을 시킨 서양란이 이쁘다며 주문량이 늘자, 치영이가 거래처를 늘리자는 제안을 했던 것이다.
밤새워 인터넷을 뒤져가며 공부를 한 보람이 나타나고 있다. 슬슬 난에 대한 자신감도 생기고, 판로에 대한 다변화를
치영이와 의논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꽃 시장에 납품을 도맡았던 치영이가 판매처에 새로운 서양란을 홍보하면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 이 근처에 여기 말고도 큰 시장이 두개나 더 있어.. "
" 거기는 나중에 가기로 하고 이만 돌아가자, 오늘 누나 오는 날이야.. "
" 난 불안해, 형.. 그쪽 매형이 어찌 나올지 모르는데.. "
" 나도 그 얘긴 했어.. 니 누나 고집이 보통이래야지.. "
대놓고 토요일만 되면 양평으로 와 자고 가는 선영이를 말려 보기도 했지만, 막무가내로 수경이 핑계를 대곤 했다.
민수 선배를 만나 그런 선영이에 대해 의논을 하며 걱정도 했으나, 그 뒤로는 이렇다 할 연락조차 없는 지금이다.
처음엔 집에서 자고 가는 선영이를 탓하기도 했지만, 나도 모르게 예전의 애뜻함이 되살아 나고 있어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도 힘들다.
" 수경이는 누나를 닮았나 봐, 아무데서나 저렇게 잠이 드니.. "
" 글쎄 말이다, 얼른 가자.. "
차 속에서 기다리던 수경이가 곯아 떨어져 있다. 아무도 없는 집에 선영이가 와 있지 싶어 서둘러 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