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벌 57
" 웬일로 여지껏 누워 있어, 몸살난거야? "
출장을 다녀 온 기척을 들었지만 귀찮아서 내다 보질 않았더니, 침대로 다가와서 아는척을 하는 남편이다.
" 그냥, 몸이 좀 안좋아.. "
밤새 시달린 덕에 움직일 기운도 없었지만, 할 얘기도 있고 해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 금방 나가봐야 하는데 옷이라도 챙겨 주든가.. "
" 당신이 꺼내 입으면 되잖어, 마누라가 아프다는데 그런것까지 시키냐.. "
" 알았다, 알았어.. "
다투기 싫다는 듯 장롱문을 열더니 이것저것 들쑤셔 놓고 속옷을 갈아입는다.
" 요즘 일은 잘 되는거야? 돈 좀 주지.. "
" 무슨 돈.. 당신 통장에 잔고가 있을텐데.. "
항상 여유돈 천만원정도는 자신의 통장에 있는걸 아는 남편이다.
" 그 돈 말고.. 이모가 어렵다고 돈 좀 빌려 달라는데.. "
달리 댈 핑계가 없어 혼자 사시는 이모를 팔수밖에 없었다.
" 이 사람이, 지금 남 빌려줄 돈이 어딨어.. 가뜩이나 물건 수매할 자본도 빠듯한데.. 그리고, 그전에 이모님 아들한테
빌려준 돈은 받았어? "
이년전에 사업을 하겠노라는 조카 녀석한테 빌려준 이천만원 때문에 부부싸움까지 했었다.
" 한달에 얼마씩 들어오고 있잖어, 옛날에 아버지가 살아계실땐 그러시지 않았다고 얼마나 섭섭해 하는지 몰라.. "
" 됐어, 그 조카한테 쏟아 부을돈이 어딨어.. 멀쩡한 두부를 젓가락으로 들쑤시는 소리를 하고 있네, 사업은 아무나
하는줄 아나.. "
바람을 피면서 여자한테 줄 돈은 펑펑 쓰면서도, 집안의 대소사에는 악착같은 구석이 있는 인간이다.
강쇠한테 새차를 뽑아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어찌 남편에게서 뜯어내 보려 했지만 애초에 접어야 하지 싶다.
콧방귀를 뀌던 웬수가 나가고 제 방에 있던 딸 미정이가 안방으로 들어왔다.
" 아빠 그 새 나간거야? "
" 바쁘다고 금방 나갔어.. 왜, 아빠한테 부탁할거라도 있니? "
" 아니, 아빠 얼굴 못 본지 한참 지난거 같애.. 근데 그 오빠는 왜 이름이 외국이름이래, 제임스가 뭐야.. "
딸아이 입에서 제임스란 말이 튀어나오는데 너무 놀라 경끼를 할 지경이다.
" 니가 걔 이름을 어떻게 안다니.. "
" 엄마를 부축하고 왔을때 음료수를 줬잖어.. 내가 이쁘게 생겼다나, 꼴에 여자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
" 너, 행여 그딴 놈들 만나면 안돼..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만 해도 될까 말깐데.. "
" 내가 미쳤어, 제비처럼 얼굴만 이쁜 남자는 싫어.. "
철없던 시절에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지금의 미정이를 낳은 자신의 전철을 밟을까봐 겁이 나는 정숙이다.
더군다나 돈을 받고 여자들의 유흥이나 달래주는, 제임스와 강쇠같은 부류하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 정사장과 재미있게 보냈나 봐, 더 이뻐졌는걸.후후.. "
" 자꾸 왜 그래요, 가만히 보면 최사장님도 짖궃어.. "
이틀씩이나 자리를 비웠기에 집에서 쉬고 있기도 멋적은 숙희는 미스김이 퇴근하기 전에 회사로 나왔다.
사무실에서 미스김을 퇴근시키고 오피스텔에 들어갔더니, 태호가 혼자 있다가 반겨 준다.
" 진희는 어디 갔어요? "
" 올때가 다 됐는데.. 몸이 찌뿌둥하다고 찜질방에 갔어요.. "
" 계속 여기 계셨나 봐요.. "
" 우리 마님이 혼자 있기 심심하다고 해서.흐흐.. "
" 그렇게 오매불망하던 진희와 오붓하게 둘이서만 지낸 태호씨가 더 좋았겠네.호호.. "
" 그걸 말이라구, 그나저나 요즘 우리 마님이 살이 빠진거 같애.. 보약이라도 지어 먹여야 할까 봐.. "
" 여자한테 무슨 보약씩이나.. 보신을 할려면 차라리 태호씨가 먹어야지.. "
" 아냐, 피부도 그 전만 못해 보여.. 신경쓰는 일이 많아서 그런건지.. "
" 부러워 죽겠네, 난 언제쯤이나 태호씨 같은 남자가 나타나려나.. "
얘기를 나누고 있는 중에 진희가 현관으로 들어선다. 찜질을 해서인지 촉촉히 젖은 얼굴이 보기에 좋다.
" 숙희 왔네.. 더 쉬고 내일쯤이나 나오지 그랬어.. "
진희가 쇼파에 앉자 태호가 냉장고에서 쥬스를 꺼내 따라준다.
" 집에 있으면 뭐해, 진희한테 보고도 해야 되고.. "
" 보고는 무슨.. 그래 할 얘기란게 뭐야? "
" 가락시장에도 같이 가보고 지방에까지 다녀 왔지만, 정사장의 일을 배운다는게 내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
싶어서 그래, 몇십년을 다져 논 일인데 그렇게 쉽게 습득이 되겠어.. "
재윤이에게 복수를 하게 되면 당장에라도 동업관계가 깨질까 봐 걱정이 되는 숙희다. 더불어 자신의 버팀목이
될수도 있는 재윤이와의 관계 역시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 그렇긴 할거야, 지금 당장 어쩌자는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정사장이 그만 둘때를 대비하자는 거니까 지켜보자구.. "
" 맞아, 정사장이 숙희씨와 친해진게 오히려 다행일수도 있어.. 정사장이 숙희씨를 멀리하려 든다면 모를까.. "
해바라기처럼 진희의 곁에만 있는 듯 싶지만, 가끔씩 사리를 분별하게끔 뒤를 받쳐주는 태호의 말이다.
" 그래서.. 정사장이 갑자기 그만 둔다면 내가 진희한테 아무런 도움도 못 될까봐.. "
" 그게 왜 숙희 책임이야, 그런 생각은 떨쳐버려.. 에그 ~ 그렇게 맘씨가 여리니까 여지껏 고생을 했지.. "
하는일 없이 월급을 받는것 같아 미안해 하는 숙희에게 살가울만치 안심을 시켜주는 진희다.
" 저기.. 이건 내 생각인데.. 수입고기를 취급해 보면 어떨까 싶어.. "
평소에 사업적인 면으로는 끼어들지 않고 관망만 하던 태호의 입에서 불쑥 의견이란 것이 쏟아져 나왔다.
" 수입고기라니.. 광우병이다 뭐다 해서 촛불시위들을 하느라고 난리들이잖어.. "
" 아냐, 어차피 수입은 해야 할거야.. 내가 아는 사람한테 알아봤더니, 현재 국내 시장에 풀리는 수입고기가 세가지
메이커더라구.. 주로 미국하고 호주에서 들어오는데 다른 메이커를 알아봐서 수입해도 괜찮지 싶은데.. "
그냥 꺼낸 얘기만도 아니고 자세히 수입처까지 알아본 듯 싶은 태호의 설명이다.
" 글쎄.. 해 본적도 없는데 괜찮을까 몰라.. "
갑작스런 구상을 들은 폭이지만, 진희의 말투로 보건대 태호의 말이라면 신빙성을 갖는다는 투로 들린다.
" 지금 하던대로 냉동창고에 넣으면 될거야, 다만 부지런한 영업사원이 한사람 필요하지 싶어.. 수입쪽은 미스김이
맡고, 숙희씨가 수량을 파악하고 영업사원 관리만 한다면 서로 일 분담도 되고.. 숙희씨도 자신이 할 일이 생기는
거니까 재미있을거야.. "
구체적으로 회사가 돌아가는 향방까지 염두에 둔 것이 느낌으로 다가 온다.
" 나도 할일이 생기면야 좋지, 아무것도 보탬이 되질 않는것 같아 불편했는데.. "
" 그럼, 성식이한테 수입처를 한번 알아봐 달라고 부탁이나 해볼까.. "
호응하는 듯한 진희의 말대로 된다면, 사무실도 바쁘게 돌아갈것이고 더불어 나 역시 한몫을 거들수도 있을것이다.
" 그렇게 해봐, 어차피 같은 무역일인데다가 보세창고를 사용하는것도 같고 거래처를 확보하는 영업사원만 뽑는다면
별 무리는 없지 싶어.. "
" 알았어, 에그 ~ 우리 강아지가 그런데까지 신경을 다 써주고.호호.. "
자신의 사무실 일까지 챙겨주는 태호가 사랑스럽다는 듯 두팔로 그의 목을 감고 찐하게 키스를 하는 진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