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벌

여왕벌 57

바라쿠다 2012. 4. 29. 08:58

" 웬일로 여지껏 누워 있어, 몸살난거야? "

출장을 다녀 온 기척을 들었지만 귀찮아서 내다 보질 않았더니, 침대로 다가와서 아는척을 하는 남편이다.

" 그냥, 몸이 좀 안좋아.. "

밤새 시달린 덕에 움직일 기운도 없었지만, 할 얘기도 있고 해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 금방 나가봐야 하는데 옷이라도 챙겨 주든가.. "

" 당신이 꺼내 입으면 되잖어, 마누라가 아프다는데 그런것까지 시키냐.. "

" 알았다, 알았어.. "

다투기 싫다는 듯 장롱문을 열더니 이것저것 들쑤셔 놓고 속옷을 갈아입는다.

" 요즘 일은 잘 되는거야?   돈 좀 주지.. "

" 무슨 돈..  당신 통장에 잔고가 있을텐데.. "

항상 여유돈 천만원정도는 자신의 통장에 있는걸 아는 남편이다.

" 그 돈 말고..  이모가 어렵다고 돈 좀 빌려 달라는데.. "

달리 댈 핑계가 없어 혼자 사시는 이모를 팔수밖에 없었다.

" 이 사람이, 지금 남 빌려줄 돈이 어딨어..  가뜩이나 물건 수매할 자본도 빠듯한데..   그리고, 그전에 이모님 아들한테

빌려준 돈은 받았어? "

이년전에 사업을 하겠노라는 조카 녀석한테 빌려준 이천만원 때문에 부부싸움까지 했었다.

" 한달에 얼마씩 들어오고 있잖어, 옛날에 아버지가 살아계실땐 그러시지 않았다고 얼마나 섭섭해 하는지 몰라.. "

" 됐어, 그 조카한테 쏟아 부을돈이 어딨어..  멀쩡한 두부를 젓가락으로  들쑤시는 소리를 하고 있네, 사업은 아무나

하는줄 아나.. "

바람을 피면서 여자한테 줄 돈은 펑펑 쓰면서도, 집안의 대소사에는 악착같은 구석이 있는 인간이다.

강쇠한테 새차를 뽑아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어찌 남편에게서 뜯어내 보려 했지만 애초에 접어야 하지 싶다.

콧방귀를 뀌던 웬수가 나가고 제 방에 있던 딸 미정이가 안방으로 들어왔다.

" 아빠 그 새 나간거야? "

" 바쁘다고 금방 나갔어..  왜, 아빠한테 부탁할거라도 있니? "

" 아니, 아빠 얼굴 못 본지 한참 지난거 같애..  근데 그 오빠는 왜 이름이 외국이름이래, 제임스가 뭐야.. "

딸아이 입에서 제임스란 말이 튀어나오는데 너무 놀라 경끼를 할 지경이다.

" 니가 걔 이름을 어떻게 안다니.. "

" 엄마를 부축하고 왔을때 음료수를 줬잖어..  내가 이쁘게 생겼다나, 꼴에 여자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

" 너, 행여 그딴 놈들 만나면 안돼..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만 해도 될까 말깐데.. "

" 내가 미쳤어, 제비처럼 얼굴만 이쁜 남자는 싫어.. "

철없던 시절에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지금의 미정이를 낳은 자신의 전철을 밟을까봐 겁이 나는 정숙이다.

더군다나 돈을 받고 여자들의 유흥이나 달래주는, 제임스와 강쇠같은 부류하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 정사장과 재미있게 보냈나 봐, 더 이뻐졌는걸.후후.. "

" 자꾸 왜 그래요, 가만히 보면 최사장님도 짖궃어.. "

이틀씩이나 자리를 비웠기에 집에서 쉬고 있기도 멋적은 숙희는 미스김이 퇴근하기 전에 회사로 나왔다.

사무실에서 미스김을 퇴근시키고 오피스텔에 들어갔더니, 태호가 혼자 있다가 반겨 준다.

" 진희는 어디 갔어요? "

" 올때가 다 됐는데..   몸이 찌뿌둥하다고 찜질방에 갔어요.. "

" 계속 여기 계셨나 봐요.. "

" 우리 마님이 혼자 있기 심심하다고 해서.흐흐.. "

" 그렇게 오매불망하던 진희와 오붓하게 둘이서만 지낸 태호씨가 더 좋았겠네.호호.. "

" 그걸 말이라구, 그나저나 요즘 우리 마님이 살이 빠진거 같애..  보약이라도 지어 먹여야 할까 봐.. "

" 여자한테 무슨 보약씩이나..  보신을 할려면 차라리 태호씨가 먹어야지.. "

" 아냐, 피부도 그 전만 못해 보여..  신경쓰는 일이 많아서 그런건지.. "

" 부러워 죽겠네, 난 언제쯤이나 태호씨 같은 남자가 나타나려나.. "

얘기를 나누고 있는 중에 진희가 현관으로 들어선다.      찜질을 해서인지 촉촉히 젖은 얼굴이 보기에 좋다.

" 숙희 왔네..  더 쉬고 내일쯤이나 나오지 그랬어.. "

진희가 쇼파에 앉자 태호가 냉장고에서 쥬스를 꺼내 따라준다.

" 집에 있으면 뭐해, 진희한테 보고도 해야 되고.. "

" 보고는 무슨..  그래 할 얘기란게 뭐야? "

" 가락시장에도 같이 가보고 지방에까지 다녀 왔지만, 정사장의 일을 배운다는게 내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

싶어서 그래, 몇십년을 다져 논 일인데 그렇게 쉽게 습득이 되겠어.. "

재윤이에게 복수를 하게 되면 당장에라도 동업관계가 깨질까 봐 걱정이 되는 숙희다.       더불어 자신의 버팀목이

될수도 있는 재윤이와의 관계 역시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 그렇긴 할거야, 지금 당장 어쩌자는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정사장이 그만 둘때를 대비하자는 거니까 지켜보자구.. "

" 맞아, 정사장이 숙희씨와 친해진게 오히려 다행일수도 있어..    정사장이 숙희씨를 멀리하려 든다면 모를까.. "

해바라기처럼 진희의 곁에만 있는 듯 싶지만, 가끔씩 사리를 분별하게끔 뒤를 받쳐주는 태호의 말이다.

" 그래서..  정사장이 갑자기 그만 둔다면 내가 진희한테 아무런 도움도 못 될까봐.. " 

" 그게 왜 숙희 책임이야, 그런 생각은 떨쳐버려..  에그 ~ 그렇게 맘씨가 여리니까 여지껏 고생을 했지.. "

하는일 없이 월급을 받는것 같아 미안해 하는 숙희에게 살가울만치 안심을 시켜주는 진희다.

" 저기.. 이건 내 생각인데..  수입고기를 취급해 보면 어떨까 싶어.. "

평소에 사업적인 면으로는 끼어들지 않고 관망만 하던 태호의 입에서 불쑥 의견이란 것이 쏟아져 나왔다.

" 수입고기라니.. 광우병이다 뭐다 해서 촛불시위들을 하느라고 난리들이잖어.. "

" 아냐, 어차피 수입은 해야 할거야..  내가 아는 사람한테 알아봤더니, 현재 국내 시장에 풀리는 수입고기가 세가지

메이커더라구..   주로 미국하고 호주에서 들어오는데 다른 메이커를 알아봐서 수입해도 괜찮지 싶은데.. "

그냥 꺼낸 얘기만도 아니고 자세히 수입처까지 알아본 듯 싶은 태호의 설명이다.

" 글쎄.. 해 본적도 없는데 괜찮을까 몰라.. "

갑작스런 구상을 들은 폭이지만, 진희의 말투로 보건대 태호의 말이라면 신빙성을 갖는다는 투로 들린다.

" 지금 하던대로 냉동창고에 넣으면 될거야, 다만 부지런한 영업사원이 한사람 필요하지 싶어..  수입쪽은 미스김이

맡고, 숙희씨가 수량을 파악하고 영업사원 관리만 한다면 서로 일 분담도 되고..   숙희씨도 자신이 할 일이 생기는

거니까 재미있을거야.. "

구체적으로 회사가 돌아가는 향방까지 염두에 둔 것이 느낌으로 다가 온다.

" 나도 할일이 생기면야 좋지, 아무것도 보탬이 되질 않는것 같아 불편했는데.. "

" 그럼, 성식이한테 수입처를 한번 알아봐 달라고 부탁이나 해볼까.. "

호응하는 듯한 진희의 말대로 된다면, 사무실도 바쁘게 돌아갈것이고 더불어 나 역시 한몫을 거들수도 있을것이다.

" 그렇게 해봐, 어차피 같은 무역일인데다가 보세창고를 사용하는것도 같고 거래처를 확보하는 영업사원만 뽑는다면

별 무리는 없지 싶어.. "

" 알았어, 에그 ~ 우리 강아지가 그런데까지 신경을 다 써주고.호호.. "

자신의 사무실 일까지 챙겨주는 태호가 사랑스럽다는 듯 두팔로 그의 목을 감고 찐하게 키스를 하는 진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