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생(殘生)

잔생 64

바라쿠다 2017. 9. 12. 20:39
"이 노옴~"
"신령님께서 어인 일로..
안개가 자욱한 숲속에서 길을 못찾아 헤매는데 하얀 도포를 걸친 
신령님께서 홀연히 나타나신다.
저절로 부복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잘 먹었느니라, 오곡밥.."
"황송합니다, 변변치 못해서.."
"썩을 놈~ 주둥아리는 청산유수로구나."
"..어인 말씀을..""
"됐다 이 놈아.  오곡밥값은 해야겠지."
".........."
"외로운 여인네가 찾아 올거니라.. 따뜻하게 감싸주거라."
"여인네라 하심은.."
"보면 알게야, 지극 정성으로 받들어야 한다."
"분부 따르겠나이다."
뿌연 안개가 신령님 주위로 뭉글뭉글 피더니 어느새 텅빈 나무 숲이다.
어젯밤 모처럼 연숙이와 뜨거운 밤을 지냈다.
아파트 명의를 연숙이에게 넘긴뒤 부터는 이틀에 한번꼴로 외박이란다.
내가 시킨대로 그러거나 말거나 지켜보는 중일게다.
술도 거나했던지라 찬물에 몸을 정갈하게 씻고 거울앞에서 매무새를 가다 
듬는다.
신령님 말씀처럼 귀인이 찾아 온다는데 소홀히 있을수는 없다.
"띵~똥"
경쾌한 차임소리에 맞춰 계단을 오르는 여인이 보인다.
생김새는 뚜렷하지 않지만 입성이 제법 단아하다.

"삐리리.."
현관으로 들어선 여인이 가볍게 목례만을 건넨다.
"이리로.." 
신방문을 열고 먼저 교탁 뒤 방석에 앉는다.
"실례합니다."
옷차림도 단아하지만 생김새 역시 참한 인상이다.
다만 미간에 깊게 패인 주름으로 그녀의 요즘이 짐작된다. 
"이름.."
"박귀순."
"생년월일.."
"59년 12월7일.."
"시.."
"묘시.."
"헐~"
".........."
가파른 절벽위에 핀 한송이 꽃이다.
보기엔 청초하고 이쁘지만 바라만 볼수밖에 없다.
"남편은.."
"56년6월15일.."
한 곳에 정착이 안되는 부평초같은 사주다.
"자식이 없으시네."
"..그걸 어찌.."
"일요일 시간되시는가.."
"..네."
"등산이나 가십시다."
".........."
겉도는 남편때문에 답답해서 이곳을 찾았을게다.
몇십년동안 반복됐을테고 그랬기에 본인 역시 큰 기대는 하지 않으리라 본다.
타고 난 사주가 그럴진대 좋은 처방이란 없다.
차라리 홀가분하게 마음을 비우는게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유~ 얄미워."
"어쩌냐, 집에 가야 하는데.."
이틀에 한번꼴로 지연이와 저녁을 먹어야 한다.
집에 가야 심심하다며 느즈막히 퇴근하는 날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늘 역시 늦었기로 턱을 빼고 기다린 지연이와 식사를 하는 중이다.
은근히 붙잡고 늘어지지 싶어 집에 행사가 있다고 거짓말까지 했다.
"다른데로 새는건 아니겠지?"
"그럴리가 있나.." 
모르는 사람이야 어리고 이쁜 애인이 있어 부럽다고 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 애인이 같은 직장에 있으면서 일거수일투족까지 감시하고 참견까지 한다면
쬐끔 갸우뚱 할것이다.
술이 취해 어쩌다 어린 아가씨와 인연이 된게지만 오래지나지 않아 뼈저리게 죄값을
치루고 있다.
애인이라면 생각날때마다 보고싶고 애뜻해야 하는데, 정 반대의 감정이라 고민이다.
오죽하면 가까이 지내는 후배에게 하소연까지 했겠는가 말이다.
나이만 어릴뿐이지 영악하기로는 그 누구도 따라올수 없다.
인상이 푸근해서 오빠를 삼고 싶다더니 지금은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다.
불과 한달여만에 어린 애인에게 건네 준 용돈이 천만원에 가깝다.
그것도 모자라 늦은 밤 불러내기가 예사고,  출근하는 아침에 픽업까지 해야 한다.
남 부끄러워 어디다 하소연하기도 어려워 믿는 후배에게 떼어 낼 묘안을 가르쳐
달라고 했건만 여직 소식이 없다.
"이따 영상 통화 해, 집 아니면 알지?"
"그래, 들어가."

"왔어요?"
"수고 많으시네, 힘들죠?
매일 식당끝나는 시간에 맞춰 희정이와 인아씨를 집에 데려다 준다.
덕분에 쓸데없는 술이 줄어 나름 위안을 삼는다.
"재미있는데 뭐."
"희정이는.."
"뭔 일인지 큰 애가 왔네."
"동훈이가 웬일로.."
"나쁜일은 아닐거야, 어둔 표정은 아니던데.."
아들애가 가게까지 찾아 오지는 않았다.
나쁜 일이 아니길 바라지만 자꾸 초조해 진다. 
"언제 왔어."
"조금전에.."
무슨 일일까 이리저리 짚어 보는데 희정이가 들어선다.
겉 보기엔 인아씨 말대로 우환은 아니지 싶다.
"미안한데 오늘 인아 택시타고 가라."
".........."
"어디 가?"
"국진씨랑 얘기할게 있어서.."
"지지배..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아냐, 그런거.."
"됐어 이 년아~ 애인없는 년 빠져 줄께."
가게 앞에서 인아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도 희정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걱정있어?"
"아냐.. 그만 가자."
"우리집으로?"
"응."